타인의 손
알몸으로 이를 닦고 있는 너를 본다. 너는 거울을 보면서 이를 닦고 있다. 너도 나를 보고 있지만 아직 나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마음 놓고 너를 관찰할 수 있다. 치약 거품이 파란 칫솔 손잡이를 타고 내려와 손을 향해 내려가고 있다. 어느새 너의 손에는 거품이 잔뜩 묻었다. 너는 칫솔을 입에서 빼 물을 틀어 거품들을 걷어 내고 아까보다 더 세게 이를 닦는다. 잠시 후 너는 아, 하고 입을 크게 벌려 입 속에 가득 든 치약 거품을 본다. 거품이 꼭 무스 같다고 생각한다. 앞뒤로 흔들어서 손바닥에 짜내면 필요 이상으로 많이 나오던 하얀 무스. 너는 필요 이상이 항상 문제라고 생각한다. 가장자리부터 스물스물 핏빛이 스민다. 잇몸에서 피가 나온 탓이다. 인상을 쓰며 세면대 위에 거품을 뱉어낸다. 일전에 치과에 갔을 때 간호사는 너의 양치 습관을 지적했다. 세게 닦으면 이가 더 시려요. 그녀는 양 미간을 찌푸리며 커다란 치아 모형을 들고 와서 이 닦는 방법을 설명했다. 너는 유치원생이 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르쳐준 대로 이를 닦겠다고 했지만 그날 밤에도 이를 세게 닦기는 마찬가지였다. 너는 이제껏 필요 이상으로 남의 말만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하얀 세면대를 느리게 기어가는 피가 섞인 거품을 본다. 수도꼭지를 돌려 나약한 자신을 탓하듯 수챗구멍 속에 거품을 밀어낸다.
이가 시린 너는 얼굴을 찡그리며 화장실을 나온다. 거실을 느리게 걸어 나오며 잠을 더 자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양치질만 한 게 어쩐지 마음에 걸린다. 샤워를 하긴 했지만 집에서 한 게 아니라선지 몸이 찌뿌드드하다. 세수를 할까, 샤워를 할까. 너는 세수와 샤워 사이를 놓고 거실을 빙빙 돈다. 그러다 그런 것 따위도 고민하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시 화장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걷다가 너는 화장실 입구에 놓인 주황색 걸레를 밟는다. 그 걸레가 작년까지만 해도 수건이었다는 걸 생각한다. 닳고 해져서 발걸레가 된 주황색 수건, 아니 걸레. 너는 지금 주황색 걸레가 된 기분이다.
어슴푸레 환해질 무렵 너는 집에 들어왔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남동생이 잠에서 덜 깬 채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누나, 지금 들어오는 거야? 하고 묻는 동생에게 너는 잠이 안 와 잠깐 바람 쐬고 오는 거라고 거짓말을 했다. 평소 너에 대해 관심이 없는 동생은 가방을 메고 있는 의심스런 복장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재빨리 가방을 숨긴 너는 남동생과 엄마가 나갈 때까지 안방에 들어가 텔레비전을 보는 척했다. 너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엄마가 못마땅하다는 눈을 흘기며 현관문을 닫자 너는 옷을 벗어던지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로 다시 들어온 너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거울을 본다. 잠을 못 잔 탓에 눈이 퀭하다. 찬찬히 얼굴과 목 주변을 살핀다. 입술이 부어 있다. 너를 안고 양쪽 귓볼과 목 주변을 거칠게 애무하던 찬이 남긴 붉은 자욱들이 여기저기 볼썽사납게 눈에 들어온다. 불안한 표정으로 거울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입술과 목 여기저기를 살핀다. 이 정도 피멍이면 며칠은 갈 텐데. 목에 스카프를 두를까, 파운데이션으로 감출까. 너는 목 주변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진다. 입술은 평소보다 두 배는 넘을 두께로 부어 있다. 엄마에게는 뭐라고 말할까? 길 가다가 축구공에 맞았다고 할까, 목에는 스카프를 두르고? 분명 믿지 않을 거라고 너는 생각한다. 휴우. 길게 한숨을 내쉰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상기한 너는 화장실 문을 신경질적으로 홱 열어젖힌다. 문을 열 때 생겨난 가속만큼 한기가 피부에 철썩 달라붙는다. 벗은 네 몸 위로 소름이 돋는다. 지은 지 20년도 넘은 15평 낡은 아파트의 초라한 실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너의 시선이 줌 카메라처럼 낡은 식탁 위에 깔린 촌스러운 식탁보에 고정된다. 칼국수 장사로 평생 벌어 어렵게 마련한 집이라고 엄마가 나름 멋 부려 깐 식탁보다. 첨엔 저렇게 더럽지 않았는데. 매달 빚 갚느라 지친 엄마는 더 이상 낡은 집에 치장을 하지 않는다.
너는 찬물은 오른쪽으로 더운물은 왼쪽으로 비틀며 물 온도를 맞춘다. 물이 좀 차다 싶어 왼쪽으로 돌리면 이번에는 너무 뜨겁다. 물 온도 맞추는 게 영 귀찮아 너는 다시 인상을 찌푸린다. 간신히 적당해진 물이 샤워기를 통해 쏟아진다. 샤워기의 물을 한손으로 맞으며 중얼거린다. 그냥 집에 올 걸, 하필 비까지 내렸어. 샤워기에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댄다. 미친년. 세찬 물줄기에 얼굴을 들이밀며 너는 괴롭다는 듯 몸을 뒤튼다. 샤워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을 한참 손으로 받던 너는 발가락 사이가 따뜻해지는 걸 느낀다. 욕조의 물은 이미 찰 만큼 차서 바닥으로 흘러넘치고 있다. 너는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의 케이크를 덥석 집어먹은 듯한 기분이 든다. 그 맛은 물컹하고 비렸다.
중학교 1학년 여름이었다. 한낮 쨍쨍 내리쬐는 땡볕은 모든 것을 지치고 무료하게 했다. 너는 시장에 간 엄마 대신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점심이 지난 오후라 손님은 없었다. 너는 덥다고 투덜거리며 선풍기에 대고 ‘아~’ 소리를 내고 있었다. 너의 아는 바람에 한없이 떨리면서 나왔다. 한 여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학생, 나 물 좀 쓸 수 있을까? 여자를 쳐다봤다. 놀랍도록 흰 얼굴이었다. 피부 속이 전부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하고 창백했다. 네가 주방 쪽을 가리키자 여자는 천천히 수도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곤 긴 치마를 허벅지까지 들어 올리고 쭈그려앉은 다음 대야에 물을 받았다. 여자의 허벅지는 얼굴만큼이나 새하얬다. 여자는 찬 물을 묻혀 손으로 얼굴과 삼단 같이 긴 머리를 쉴 새 없이 씻어 내렸다. 여자의 씻는 모습을 힐끔 훔쳐보던 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야에 담겨 있던 선홍색 핏물을 본 것이다. 어디서 그렇게도 많은 피가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너는 그 핏물을 보는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여자는 한참을 물로 얼굴과 머리카락과 허벅지를 씻었다. 여자는 치마로 얼굴과 머리를 닦아내고 다시 머리를 묶었다. 고마워요. 너는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여자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꿈 같은 상황이었다. 여인은 슬펐고, 아름다웠다. 잠시 후 앰뷸런스 한 대가 여자가 올라간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망연히 바라보던 너는 아랫배가 아팠다.
화장실에 들어간 너는 배를 움켜쥐며 바지를 내렸다. 그러다 손을 부들거리며 팬티 속에 있는 그것을 보았다. 첫 생리였다. 대야에 물을 담아 피가 묻은 속옷을 빨기 시작했다. 빨래를 마치고 몸을 씻은 너는 가겟방에 들어와 반듯하게 누웠다. 그리고 어깨를 주억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머리카락과 베개를 적실 때까지 너는 소리까지 내며 서럽게 울었다. 그 여자 때문에 우는 것인지, 첫 생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너는 자신이 왜 우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 한없이 울었다.
내가 너를 응시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말하자면 너는 그때 비로소 여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너의 첫 생리와 동시에 생긴 마음속 동요는 울음으로 터져나오고 있었다. 죽어가는 여자의 아름다움은 지나온 그녀의 삶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결코 여자의 행복일 수 없었다. 죽음과 상반된 아름다움. 어쩌면 그런 게 삶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어린 너는 어렴풋이 들었을지 모른다. 그러자 슬픔이 치밀어 올라왔다. 슬픔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아주 멀고 먼 곳에서, 오래전부터 연유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슬픔은 필연적이다. 네가 너의 삶에서 어떤 필연을 선택할지, 궁금하다.
너는 여러 형태의 강박에 시달리는 아이였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반 아이 누가 중2 여학생 강간율이 제일 높다는 말을 했는데, 이후부터 너는 줄곧 강간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가슴에 불이 나는 증상에 시달렸고, 2학년 때는 가슴의 불이 발로 옮겨와 뜨거운 발을 주체하지 못해 애를 먹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야 너는 이런 증세가 갑갑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너는 정해진 시간 동안 교실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공간 속에 갇혀 있는 것 역시 참을 수 없었다. 현실에선 어느 것도 달라질 수 없었다. 이후부터 너는 공간 이동을 꿈꿨다. 몸을 그대로 두고 의식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의 너야말로 비로서 자신이 바라오던 모습이었다. 그런 상상은 너를 강박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주었지만, 현실을 더욱 견디기 힘든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너는 너와 비슷한 증세를 호소하는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고3 짝이던 상희였다. 전교 10등 안에 들던 상희는 바퀴벌레가 천장에서 떨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상희는 학교에서도 늘 불안해했고, 집에서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공부를 한다고 했다. 언젠가 상희는 엄마가 자길 버릴까 봐 열심히 공부한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너는 상희에게도 네가 생각한 방법을 권했지만, 상희는 효력이 없다고 도리어 괴로워했다. 졸업 후 넌 다른 대학에 들어간 상희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학과 공부에 재미를 붙일 수 없다고 했다. 그녀는 무료함을 달래고자 혼자 히틀러를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너의 강박은 고쳐지지 않았다. 너는 창문이 열려 있지 않은 강의실에 들어가지 못했다. 언젠가 교양수업 시간이었는데 교수가 바람이 부니 창문을 모두 닫으라 지시했다. 바로 앞자리에 앉아 처음 몇 분을 참던 너는 결국 벌떡 일어나 뛰쳐나갔다. 교수는 반 학생들에게 방금 나간 저 학생이 자신 때문에 화가 났느냐고 물었다.
너는 창문이 열려 있지 않으면 몸 안에서 짐승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다고 대학 때 처음으로 사귄 친구 은희에게 고백했다. 은희는 진지한 표정으로 병원에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언했다. 너는 일단 대담해지기 위한 치료의 일환으로 담배를 피워보겠다고 말했다. 은희는 자기도 피워보고 싶다며 호기심 어린 눈을 빛냈다.
수업이 끝난 어느 날, 은희가 휴지로 말아 싼 무언가를 네 손에 쥐어주었다. 담배였다. 그날 새벽, 너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냄새가 나지 않게 초도 하나 미리 켜두었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가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걸 느끼는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한 번 더 빨아보았다. 목욕탕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너는 겨우 수습하고 방까지 기어가 그대로 쓰러졌다. 다음 날에도 은희는 너에게 휴지로 싼 담배 한 개비를 줬다. 그날은 화장실에서 두 모금을 빨았다. 이번에는 세 번째 빨았을 때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음 날도 은희는 네게 담배를 내밀었다. 은희는 너에게 도합 일곱 개비의 담배를 건넸다. 다섯 개비째 피웠을 때 너는 담배가 맛있다는 생각을 했다. 은휘는 담배에 대한 느낌을 너에게 줄곧 묻곤 했다. 그러나 정작 은희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너는 은희가 너와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희가 그리웠다.
어제는 성년의 날이었다. 선배들이 술자리를 마련했다. 너는 은희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성년이 된 후배들에게 돌려진 장미꽃은 회비를 걷어 일괄적으로 근처 꽃집에서 주문한 것들이라 포장지와 리본 등이 전부 똑같았다. 너는 똑같은 꽃을 받아들고 있는 자신이 진열장의 인형이라도 된 듯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선배가 옆에 있어서 너의 성년식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너의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너는 가슴이 설렜다. 여자아이 중 몇은 누군가로부터 고백이라도 받은 듯 똑같은 장미 옆에 다른 종류의 선물과 꽃이 함께 놓여 있었다. 이미 커플 선언을 한 이들도 있었다. 학교 앞 술집 여기저기 성년을 한 이들과 축하해 주는 이들로 들썩거렸다. 들뜬 너는 여러 잔의 술을 받아마셨다.
즐겁게 술을 마시는 무리 중에는 찬도 있었다. 그 역시 오늘 성년이 된 참이었다. 너와 학번이 앞뒤인 처지라 너는 찬과 입학 때부터 말을 텄다. 너는 동갑인 남자애들은 모두 유치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 너의 생각을 대변하듯 찬은 골뱅이 무침을 연신 게걸스럽게 입으로 나르고 있었다. 찬이 너와 눈을 마주치자 피식 웃었다. 못생긴 건 아니지만 입을 추할 지경으로 넓게 벌리며 웃는 모습이나 평소 유치한 농담을 건네던 모습이 떠올라 건성으로 받아주었다. 너는 찬 또래의 애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매력을 선배가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서 풍기는 지성과 곤색 점퍼 안에 숨겨진 넓은 가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너는 오늘 선배와 자고 싶다고 고백하려 했다. 그 전부터 선배에게 할 고백을 마음속으로 되뇌이며 연습했었다. 너는 성이라는 게 매우 위태로운 거란 사실을 경험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너는 가겟방에서 손님이 먹고 간 그릇을 치우고 있었다. 다 치우기도 전 남자 손님이 하나 들어왔다. 음식을 대먹는 집 근처 공사장 인부였다. 그는 상을 닦고 있는 너를 느닷없이 덥석 안아 벽 쪽으로 몰아 자신의 양다리에 올려놓고 두껍고 끈적거리는 입술을 부벼댔다. 그의 거친 손은 아직 채 여물지도 않은 너의 젖가슴과 음모도 나지 않은 그곳까지 단번에 쓸었다. 거칠고 투박한 손 몇 개가 너의 성기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는 빼낸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핥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가게에서 손님 치르기에 바쁜 엄마는 방안에서의 일을 알아채지 못했다. 다리를 버둥거리고 완강히 저항하는 너의 몸짓은 사내의 억센 손길에 비한다면 부질없었다. 어린 너는 네가 당한 그것이 성폭행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때 느낀 불쾌한 느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생생해졌다. 입술과 성기의 치욕스런 느낌이 떠오를 때마다 너는 사내를 찾아낸 뒤 그의 두텁고 더러운 입술과 손가락을 잘라내는 상상을 했다. 너는 또 다른 누군가로부터 치욕을 당하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하고 싶었다.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주는 대로 받아먹은 게 탈이었다. 목까지 차오를 정도로 주량을 넘어서고 말았다. 술을 마셔본 경험이 없는 너는 게다가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신 탓에 더 빨리 취해버렸다. 변기통을 붙잡고 여러 차례 속을 게워냈다. 속이 좀 편해진 너는 거울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러나 술자리로 돌아오니 그는 자리에 없었다. 너의 단짝 은희도 없었다. 은희 어디 갔어요? 네가 옆자리 선배에게 묻자, 준식이랑 같이 나갔어. 은희가 취했다고 바래다준다던대?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실망한 너의 심장이 벼랑으로 곤두박칠쳤다. 입구가 막힌 스웨터를 입으려 안간힘을 쓰며 버둥거리는 기분이었다. 너는 가방 앞주머니 지퍼를 열어 손을 휘저었다. 손끝에 막대 사탕이 하나 딸려 나왔다. 골라 봐. 며칠 전 그가 후배들에게 내민 사탕 중 하나였다. 너는 그중 초록색을 집었다. 다른 애들은 쪽쪽 소리를 내며 사탕을 빨아먹었지만 너는 먹지 않고 가방 속에 넣었다. 그가 처음으로 네게 준 선물이었다. 초록색 포장지도 뜯지 않고 어금니를 맞부딪치며 우두둑 사탕을 깨물었다. 사탕 알갱이와 침과 이빨로 찢긴 포장지가 입안에서 한데 뒤엉켜졌다. 입술 주위로 침과 끈적이는 사탕이 묻어나왔다. 현실은 전혀 달콤하지 않았다.
너는 혼자 슬그머니 술집을 나왔다. 기운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한참 걷다가 너는 마지못해 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걸 남자가 찬이뿐이라는 게 더 서글펐다. 너는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찬에게 집에 못 가겠어,라고 말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정신을 못 차리는 건지, 그에게 쏟아내지 못한 열정 때문에 네 청춘이 주저앉아 버릴까 두려워서 그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있다 비실비실 걸어오는 찬의 모습이 보였다. 웬 술을 그렇게 마셨냐? 찬은 실실 웃으며 너의 팔목을 잡았다.
찬과 너는 학교 근처 어느 카페에 들어갔다. 홀 안은 매우 어두웠고 두 테이블 정도 손님이 앉아 있었다. 어차피 늦었으니까 술이나 깨고 가. 찬은 너에게 묻지도 않고 커피와 맥주를 주문했다. 너는 테이블 위로 무너지곤 중얼거렸다. 아아 오늘 해야 되는데. 그러자 찬이 뭘? 하고 물었다. 너는 혼자서만 들리는 소리로 계속 웅얼거렸다. 홀 안에는 라디오 헤드의 ‘creep’이 흘러나왔다. 평소 그가 잘 부르던 노래였다. 후배들 앞에서 그가 눈을 감고 특유의 저음으로 이 노래를 부를 때면 너는 그의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졌다. 후렴구가 홀을 울리며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런,런,런. 음악이 감겨들자 너는 더욱 선배가 그리워졌다. 보컬의 절규하는 런이 이어지는 그 시간, 갑자기 우두두둑 사방으로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맥주를 마시던 찬이 어눌한 말투로 내뱉었다. 어? 비오네. 음악과 세찬 빗소리의 거센 리듬과 함께 너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너는 테이블에서 느닷없이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야아아아. 빗줄기는 꽤나 굵어 너는 금세 머리부터 속옷까지 흠뻑 젖어버렸다. 뛰어가는 너를 보고 당황한 찬이 따라나왔다. 야, 너 그러다 감기 걸려. 너는 비가 퍼붓는 중간에 서서 음악에 맞춰 발을 구르며 빙글빙글 돌았다. 빗속에서도 런은 이어졌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보니 너는 빗속에서 찬에게 안겨 있었다. 빗줄기는 가늘어질 기미 없이 여전히 세차게 내리붓고 있었다. 찬은 쓰러져 기대고 있는 너의 몸을 감고 입술을 맞부딪혔다. 찬의 뜨거운 혀가 너의 입안으로 부들부들 떨며 들어왔다. 지금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차갑게 퍼붓는 비의 차가움과는 전혀 다른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가슴이 닿은 곳에서부터 터질 듯 요동치는 찬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찬은 정신없이 너의 입술 위아래를, 너의 혀와 입안 곳곳을 삼키기라도 하듯 사정없이 빨아댔다. 찬의 입 안에서는 휘얼싸한 니코틴 섞인 알콜 냄새가 풍겼다. 더 이상 음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너는 자신이 전혀 다른 시간 속으로 휘말려 드는 기분을 느꼈다. 좌절된 욕망에 대한 슬픔과 상반되는 쾌감을 동시에 느끼며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귓전을 때리는 세찬 빗소리와 굵은 빗줄기가 온몸을 샅샅이 흝는 사이, 이제 막 성년이 된 어린 너의 몸속에 웅크리고 있던 조바심도, 무모하기 그지없는 욕망도 빗속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비를 흠뻑 맞은 너를 끌어안고 찬은 카페에서 멀지 않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에서 고개만 내민 여자는 두 사람을 한번 째려보곤 미성년자 아니죠? 하고 물었다. 찬이 어정쩡한 목소리로 아니라고 말하자 여자는 순순히 출납계를 디밀었다. 이미 빗속에서 정신을 못 차릴 만큼 충격을 받은 너는 찬의 손에 이끌려 순순히 계단을 올라갔다. 젖어서 축 처진 너의 머리카락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너와 찬은 잠시 방안에서 침묵했다. 어색한 기색의 찬은 말 없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온몸이 납처럼 무거워진 듯했다. 지친 너는 젖은 그대로 침대 한 귀퉁이에 모로 누웠다. 잠시 후 몸을 씻고 나온 찬이 더듬더듬 말했다. 그냥 자면 감기 들어. 너는 대꾸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간 흘렀다. 젖은 옷을 바닥에 널어놓고 긴 수건만 몸에 걸친 찬은 어색한 듯 침대 바닥에 앉아 리모컨을 집어들었다. 찬이 리모컨 버튼을 누를 때마다 너의 귓전으로 소리들이 파고들었다. 홍콩 영화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중국어 대사들은 뮤직비디오 노랫소리, 그러다 여성의 신음 소리, 잠시 후 오래된 명화 대사……. 방안은 찬이 돌리는 화면마다 제각기 다른 밝기로 움직였다. 소리들이 이어질 때마다 너의 의식은 점점 분명해졌다. 낯선 공간에 남자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너를 긴장하게 했다. 입 안에선 불쾌한 술기운이 느껴졌고 젖어서 달라붙은 옷은 몸을 갑갑하게 했다. 몸과는 반대되는 기운이 떠다니듯 머리는 공중에 떠 있는 듯했다. 시간이 갈수록 너는 바깥 세상과 격리된 듯한 고립감을 느꼈다. 너의 눈은 부르르 감겼다.
네가 감긴 눈을 뜬 건 옆자리에 찬이 누운 기척이 느껴졌을 때였다. 찬 역시 너의 반대편을 향해 모로 누웠다. 이불이 당겨져 너와 찬 사이 빈 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마른침을 삼키는 찬의 목울대 소리가 들렸다. 텔레비전을 그대로 켜둔 채였다. 찬은 잠시 뒤척이다 잠잠해졌다. 너는 그가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찬이 너를 일으켜세웠다. 왜 이래? 이러다 감기 걸려. 찬은 저항하는 너를 힘으로 제압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젖은 재킷을 벗기고 밑에서부터 밀어 올려 셔츠를 벗겨냈다. 짝 달라붙어 쉽게 내려가지 않는 너의 청바지도 결국은 찬의 완강한 힘에 뒤집어져서 내려갔다. 걱정과는 다르게 속옷만 남은 네 몸을 찬은 천천히 도로 눕혀주었다. 찬은 민망한 듯 다시 이불을 덮고 너에게 등을 보이며 누웠다. 너는 색깔과 모양이 서로 다른 팬티와 브래지어를 입고 있는 자신이 창피했다.
너는 새우처럼 웅크리고 돌아누웠다. 침대 뒤편 유리 창문으로 어둠이 보였다. 비는 어둠 사이로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시간이 꽤 지났을 것이다. 날이 밝으려면 얼마나 더 있어야 할까. 지금 여기 누워 있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뒤에서 찬이 너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따뜻한 몸이 싫지 않았다. 너의 차가운 배 위에 찬의 뜨거운 손길이 얹혀졌다. 조금씩 긴장이 풀려가는 걸 느꼈다. 다음, 놀랍게도 네가 먼저 돌아누웠다.
찬의 입술 위에 너의 입술을 포갰다. 이제까지의 너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어서 찬은 당황해했다. 부들거리는 찬의 손길을 거칠고 차분한 너의 몸이 이끌었다. 너는 네 손으로 젖은 브래지어를 풀어 침대 밑으로 던지고 양손을 벌려 찬의 머리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찬이 너의 가슴을 애무하는 동안 너는 신음을 내며 찬의 등을 손가락으로 할켜댔다. 한 차례 뒹굴다 찬의 위로 올라온 너는 발 사이에 걸리적거리던 이불을 걷어냈다. 찬의 벗은 몸이 드러났다. 찬의 페니스는 이미 딱딱하게 발기되어 있었다. 너는 그의 막대 사탕을 바라봤다. 할 수만 있다면 우두둑 소리 내 씹어먹고 싶었다. 두려움으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는 무모한 자신과 결별하고 싶었다. 지금과 다른 네가 되고 싶었다. 찬과의 섹스에 몰두하는 동안 몸과 마음은 이미 너의 것이 아닌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는 그런 자신이 낯설었지만 뭔가 대단히 멋지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너의 의지와 상관없이 새로운 의식을 가진 몸이 제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너는 찬을 너의 욕망이 원하는 마음껏 취하기 시작했다.
이제 나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네가 대학에 들어와 처음으로 간 M.T 때 강가에서 우연히 손에 든 조약돌과 같은 나이를 먹었다. 내 안에는 어느 고산지대 평원을 가로지르며 물을 길어 나르고 야크의 똥으로 불을 지피고 또 그들의 말린 지방을 잘라 저녁을 짓는 여인의 설움이 들어있다. 어느 사내에게 강간당하고 그의 씨를 받아 아이를 낳고 후일 그의 아버지처럼 짐승이 될지 모를 사내아이를 기르는 여인의 시퍼렇게 멍든 눈빛이 들어있다. 또 할례를 거부하고 어느 밤 도망쳐 나와 야생림 우거진 절벽 위에 서서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얼굴빛 검은 아프리카 처녀의 슬픈 영혼이 들어있다. 나는 얼굴을 검게 칠하고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티베트 땅을 밟은 여인의 푸른 눈동자이기도 하다. 나는 먼 나라에서 오빠의 수음을 돕고 있는 여동생이고, 어느 농가에서 개처럼 맞고 있는 뚱뚱한 안주인이며, 아홉 살 때 집 근처 어느 사내에게 납치당해 12년 동안 그의 집에 감금되어 살던, 결국은 자신을 납치한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된 그녀이다. 나는 늦은 밤 집 뒤 과수원에서 사내를 만나 처음으로 손을 잡히고 촉촉이 젖은 눈으로 고개를 숙인 채 이별한 뒤 할아버지의 억센 손에 이끌려 생전 처음 만난 아버지에게 시집을 가야 했던 네 엄마의 한 서린 인생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하얀 얼굴과 긴 머리를 늘어뜨리며 하염없이 피 묻은 몸을 닦아내던 중년 여인의 가늘고 여린 인생이다. 나는 남자를 위해 친구를 이용한 은희이며, 수억만 년을 여인으로 살아온 그녀들이다. 지금 나는 이제 막 여자가 되어가는 너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하고 있다. 나는 네 안에서 곰팡이가 피듯 서서히 자라나 네가 주저하고 있는 사이, 날선 눈으로 너를 쏘아보고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르며 사정없이 할켜댔다.
너는 목 주변에 생긴 멍 자국이 빨리 없어지도록 욕조 깊숙이 몸을 담그고 있다. 더운 기운에 지친 너는 욕조에서 나와 변기 위에 털석 주저앉는다. 아랫도리가 뻐근하다. 오줌 줄기가 몸속에서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아랫도리가 욱신거린다. 일어나 변기 안을 쳐다보던 너는 화들짝 놀란다. 옅은 다홍빛 핏물이었다. 여린 물감을 풀어놓은 듯 그것들은 변기 안에서 하늘거리고 있다. 어깨에 붙어 있는 너의 양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자궁에서 허벅지 안쪽까지 이어지며 전기충격과 같은 움찔함이 느껴진다. 그제서야 너는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마치 또 다른 네가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와 합쳐진 듯하다.
너는 벌떡 일어나 거울을 뚫어질 듯 응시한다. 그러다 어느 늦은 밤, 때에 찌든 식탁보가 깔린 식탁에 앉아 혼자 소주를 마시며 중얼거리던 엄마의 푸념을 떠올린다. 내가 네 아버질 사랑해서 결혼한 줄 아니? 내가 사랑한 사람은 따로 있었어. 조기퇴직을 당한 너의 아버지가 암 투병 후 죽은 몇 달 후였다. 아버지가 남긴 쥐꼬리만 한 퇴직금은 은행 빚과 사채로 이미 날아간 상태였다. 더구나 그 사채란 것이 아버지와 내연 관계였음이 분명한 과부의 돈이었음을 장례 후 알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당직을 선다는 아버지는 3년 넘게 회사가 아닌 과부의 집에서 당직을 서고 있었다. 과부는 집에서 불과 10분거리 아파트에서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한 며칠 뒤 과부는 아들을 데리고 너의 집에 나타났다. 아무것도 모르던 엄마는 가게 보증금을 그녀에게 양도했다. 결국 남은 재산은 낡은 이 집뿐이었다. 너는 술에 취해 중얼거리는 엄마의 기미 낀 눈을 바라보며 배신감을 느꼈다. 사랑 없이 낳은 자식이었어?
너의 부모는 시작부터 사랑이 없었다. 빨간 저고리에 초록색 치마를 입고 지참금으로 가져온 쌀 한 가마니에 팔리듯 시집온 엄마의 옷고름을 끄르던 떨리는 아버지의 손끝에조차 여자가 하나 딸려 있었다. 결혼한 몇 달 뒤 눈썹 끝이 올라간 왠 여자가 집에 찾아왔을 때 아버지는 엄마에게 저녁을 지어오라 했다. 엄마는 봉지에서 따라낸 마지막 쌀을 안쳐 저녁을 지었다. 아버지와 여자가 방 안에서 밥을 먹는 동안 젊은 엄마는 부엌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아버지는 문고리를 열고 문지방에 걸터앉아 엄마에게 천 원을 내밀었다. 아오리로 사와. 여자가 좋아하는 사과를 사러 때에 찌들고 입구가 벌어진 낡은 플라스틱 슬리퍼를 끌고 나가던 엄마의 눈엔 원망에 찬 눈물이 맺혔다.
너는 그날 체념과 독기로 가득해진 엄마가 장롱 안에 꼭꼭 감춰둔 한 여자를 보았다. 과수원 그밤, 부들거리며 불을 뿜던 사내의 뜨거운 연정을 간직한 채 하염없이 울고만 있던 여자. 부지깽이를 들고 쫒아와 돈벌이가 없어 허락할 수 없다고 호통을 치던 아버지를 소처럼 눈만 꿈뻑거리며 원망하던 여자. 아버지에게 벗어나지 못하고 그와 닮은 남편에게 평생 버림받은 여자. 너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때에 찌든 식탁보 위에 소주잔을 놓고 청승맞게 눈물을 흘리진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젊은 날의 엄마가 된 듯하다. 네가 원하던 열망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 버린 듯 허탈한 심정이다. 앙큼한 은희 년도 아오리를 좋아할 거야. 은희의 얼굴을 할퀴고 싶다. 고년의 얼굴에서 흐르는 시뻘건 과즙을 빨아먹고 싶다.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콧망울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목으로 훔치며 너는 너에게 일어난 변화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때 전화 벨이 울린다. 누굴까. 너는 찬을 생각한다. 찬일 리 없다. 그렇게 배려심 많은 애가 아니다. 자길 보면 슬금슬금 피하기 바쁠 거라고 너는 생각한다. 가게에서 엄마가 전화를 건 것일 거라 생각을 바꾼다. 엄마는 분명 전화에 대고 욕을 진탕 해댈 것이다. 해가 중천으로 떴는데 밥도 안 처먹고 뭐 하고 있는 거냐고 난리를 칠 것이다. 비싼 등록금 내고 게으름이나 핀다고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이다.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지금은 현실의 엄마를 만날 자신이 없다. 잠시 후 벨소리는 잠잠해진다.
벨이 또 울리고 있다.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밥 먹으라고 엄마가 다시 전화를 건 것일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다섯 번째 벨이 울리자 엄마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엄마는 보통 서너 번 정도 울리다 받지 않으면 더는 전화하지 않는다. 엄마가 아니라면, 누굴까? 찬은 분명 아닐 것이다. 선배일지 모른다. 그러자 흥분되기 시작한다. 그가 어젯밤 먼저 간 게 미안해 너에게 전화를 건 것일지도 모른다.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그가 전화로 미안하다고 말한다면 너는 괜찮다고 말할 것이다. 어쩌면 오늘 시간이 있느냐 물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있다고 할 것이다. 어제 일은 모조리 잊고 선배와 다시 잘해볼 거라고 너는 생각한다. 벨이 울린다. 분명하다. 분명 그의 전화다. 너는 몸을 일으켜 후다닥 화장실에서 뛰쳐나온다. 그러나 너무 급히 나와버렸다. 순간 너는 주황색 걸레를 밟으면서 중심을 잃고 거실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미끄러지는 너의 몸은 허공에서 정확하게 일직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쿵, 하는 소리의 파장음은 머리, 엉덩이, 그리고 팔 다리 순서로 진행된다. 네가 쓰러진 바닥 주변으로 머리와 몸에서 떨어진 물기가 미련을 남긴 열정처럼 사방 풀어헤쳐져 있다. 너는 몸을 뒤틀다가 결국은 몸을 일으키지 못한다.
벨은 여전히 시끄럽게 집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다. 거실 창 쪽으로 분가루 같은 햇살이 들어와 쓰러져 있는 너의 알몸 절반에 걸쳐 있다. 겉으로 보기에 너의 모습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고통스러워하지도 신음을 내지도 않는다. 천장을 향해 감겨진 눈에서는 원망이나 서러움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벌거벗은 너의 목 주변으로 붉은 피멍들이 곰팡이처럼 여기저기 피어나고 있다. 곰팡이 핀 그 위로 어쩌면 꾸물꾸물 버섯이 자라날지 모른다. 너는 마치 잠을 자는 듯 꿈을 꾸는 듯 조용히 누워 있다. 하지만 나는 네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다. 마침내 너를 깨우기로 결심한 나는 천천히 바깥으로 걸어나왔다. 이제 갓 따온 싱싱한 아오리처럼 여전히 새파란 생기를 간직한 채 누워 있는 너의 나체를 바라보다가 물에 젖은 너의 머리카락과 몸을 혀로 핥았다. 그리고 깊은 심연 속에서 흐느적거리고 있는 너의 여성(女性)을 향해 은밀하고도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