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손
광장에 나왔다. 벗어나고 싶었다. 그에게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세상이 달라져야 했다. 변화는 광장에서 시작된다고 믿고 있었다. 광장에선 모두가 변화를 외친다. 여기도 광장이 있었다. 광장에 가면 변화를 외치는 이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세상이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나는 이 모든 것이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핑계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이 달라지지 않아도 그에게 이별을 고하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그런 사사로운 생각을 갖고 광장에 나오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지도 몰랐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훨씬 광대한 포부로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보다 확실한 믿음을 위해, 혹은 결심을 위해 무모한 원칙들을 만들어 놓고 그 방향을 향해 간다. 내가 만든 망상들이 지금의 내 모습인 셈이었다. 언제부터 나는 그 짓거리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습관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마치 내가 생각한 원칙들을 성실하게 행동으로 옮기면 그와 상처 없이 이별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린 그냥 헤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도 했다. 그를 놓기 위해서는 그보다 가치 있는 걸 하고 있다는 확신을 스스로 세워야 했는데, 너 말고 다른 사람보단 너 말고 다른 세상이 훨씬 그럴 듯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너 아닌 다른 누가 너보다 더 의미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순 없었다. 나는 그렇게 별볼일없는 인간이었다. 그는 나처럼 별볼일없는 인간이라기보다 내가 견딜 수 없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나를 사랑해주는 그를 별볼일없는 인간이라고 폄하한다고 해서 그가 받은 상처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너와 내가 이렇게 서로를 견디는 것보다는 자유를 택하는 게 훨씬 인간답지 않겠나 하는 것이었다. 그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했다. 너를 견디는 게 세상을 견디는 것보다 자기로선 훨씬 수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결국 그는 나를 원해서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싫어서 내 옆에 있는 거였다.
너는 틀렸어. 나는 광장에 갈 거야.
그래 봤자 뭐 달라지냐?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그가 싫었다. 그의 비루한 비관보단 나의 무모한 낙관이 낫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가 싫었다. 싫은데 이유 따위가 뭐람. 우린 결국 쓸쓸해져버렸다. 그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나는 광장에 나섰다.
광장에 나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간단했다. 지하철을 두 번만 갈아타면 됐다. 결심을 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광장으로 가는 길은 맥이 빠질 만큼 간단했다. 이렇게 쉬운 줄 알았더라면 좀더 일찍 광장에 가는 길을 택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는 투덜거렸다.
전동차가 서자 내렸고 광장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광장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저마다 무리를 이루어 무언가에 대해 열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체 무슨 얘길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탓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나를 자신들의 언어로부터 방어하고 있어서였다. 그들은 타인들이 자기들에게 다가와 이야기 듣는 것을 극히 꺼리고 있었다. 마치 속닥거리며 어떻게 하면 이 광장을 깨끗하게 폭파시킬 수 있을까 작당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언어가 너무나 소중해 뜨내기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힐끔거리는 나를 곁눈질로 쏘아봤다. 저리 가라고 턱을 주억이는 이도 있었다. 그 반응은 불쾌했다. 물건을 사달라거나 무리한 요구를 한 것도 아닌데 무턱대고 그런 격한 거부는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턱짓은 재수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신참이고 그들은 이곳에 터를 잡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한 경험자들이니 잠자코 물러설 수밖에. 다른 무리들도 처음 무리와 대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쓸쓸해졌다. 광장에 나서겠다는 결심이 그리 만만한 건 아니었는데, 나를 받아줄 무리가 없다는 게 기분을 울적하게 했다. 돌아갈까. 그럴 순 없었다. 어떻게 한 결심인데. 얼마 만인데. 게다가 그가 나에게 보일 반응도 싫었다. 거 봐. 내가 별볼일없을 거라고 했지? 넌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아냐?
예전에도 광장에 나선 적이 있었다. 지금보다 어릴 때였다. 그때는 여기저기서 나를 받아들여줬다. 심지어 내가 자기들 무리 속에 끼기를 간절히 바라며 설득하기까지 했다. 가끔 너무 적극적인 무리의 구성원이 성가시기도 했다.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설명하다 저 혼자 감흥에 겨워 울부짖기도 했다. 무서웠다. 그는 무리를 위해 자기가 하는 행동들이 목숨을 바쳐도 될 만큼 끝내주는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자기를 포기할 만큼 무리가 소중하다면 무리가 잘못되면 자기는 어떻게 되나. 그러면 자기는 무리의 부속품 같은 존재인가. 결국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말았는데, 무리는 빠르게 나를 잊어주었다. 내가 없어도 무리에 합류할 다른 인간들이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었다.
도시는 잉여들로 넘치는 곳이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너는 잉여야. 하고 도시는 싸늘하게 내뱉곤 했다. 넌 너무 차. 아무리 도시를 비난해도 도시는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를 만났다. 그 역시 도시를 향해 냉소를 외치던 중이었다. 이 씹쌔야! 그는 몹시 취한 상태였다. 취한 그를 도시가 받아줄 리 없었다. 그도 나도 도시에서 살아갈 방 한 칸 없는 잉여일 따름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겁도 없이 무리를 이탈한 상태였다. 외로울 수밖에. 그와 나는 의기투합했다. 우리는 또 하나의 무리를 만들었다. 결국 나도 무리 속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무리와 이 무리는 차원이 달랐다. 그 무리는 세상을 바꾸려는 무리였고, 이 무리는 세상 따위는 관심 없다는 무리였다. 무리가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세상을 바꾸려고 하나. 그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부질없어.
부질없지. 이런 말을 할 사람은 지금 광장에 없을 텐데. 누구지? 언제 왔는지 내 옆에 웬 사내가 서 있었다.
거 참. 이 광장 말야. 너무 센스가 없어 주시잖아. 화장실 찾기가 어찌나 어렵던지. 맞은편 호텔에 들어갔더니 노숙자 취급을 하더군.
그럼 아니세요? 하고 물어볼 뻔했다. 낡은 포대 같은 흰 망토를 뒤집어쓰고 이상한 모자와 신발을 신고 있는 사내는, 얼핏 보면 코스프레 복장을 입은 광대 같기도 하고, 자세히 보면 노숙자 같았다. 어디서 저런 넝마를 주워 입었을까. 곡물이나 옥수수 같은 작물을 담아두는 포대로 망토를 만든 것 같았다. 모자나 신발은 골동품상 구석에 처박아 둔 것을 꺼낸 것 같이 영 구닥다리였다. 자세히 보니 흰머리가 희끗하고 주름도 깊어 사내가 아니라 노인에 가까웠다. 아무튼 광장에서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아 무안하던 차였기에, 사내의 등장은 떨떠름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것이었다.
저런 건 말야. 참 부질없어.
사내는 도시만큼 짓궂은 표정으로 냉소를 뱉어냈고, 그런 그를 보니 공연히 나는 한마디 하고 싶어졌다.
왜 부질없어요?
허허 그럼 부질 있나?
가능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이 변할 수도 있는 노릇 아니겠어요?
저런 식으론 세상이 변할 수 없어.
저런 식이 아니면 세상이 어떤 식이어야 세상이 달라지는데요? 다 같이 모여서 우리는 이런 게 싫다.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달라 외쳐야죠.
그러면 뭐가 달라진다고 생각하나?
그럼요.
그래서 넌 달라졌니?
세상 얘기하는데 내 얘기가 왜 나옵니까?
네가 변하고 싶은 거 아냐?
세상이 달라져야죠.
어느 게 먼저야?
그야 세상, 나, 그러니까.
달라졌어?
그래요 전 달라졌어요.
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사내가 손에 쥐고 있던 뭔가를 쳐들어 나를 때렸는데, 그 바람에 뭔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놀랍게도 바닥에 떨어진 그 뭔가는 조금 전까지 내 머리통에 붙어 있던 귀였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귀를 한참 봐도 전혀 상황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지팡이였다. 지팡이로 내리쳤는데 귀가 떨어져나갔다는 걸 누가 믿을 수 있겠나? 귀가 잘린다는 건 일생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일이다. 세상에 이게 말이 되나. 나는 떨리는 손으로 오른쪽 머리통, 그러니까 조금 전까지 귀가 있던 자리를 더듬거렸다. 귀가 없었다! 정말 잘린 거였다. 그것도 노인네의 지팡이로! 잘린 부위에서는 통증도 없었고 피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귀가 있던 자리는 이미 말끔하게 봉인되어 있었다. 이럴 때 기절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왜? 큰 맘 먹고 광장에 나왔건만 이런 미친 사내를 만나 귀가 잘리는 수모를 겪어야 하는지 나는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어랍쇼.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뭐가?
뭐가라니요? 이걸 보고도 지금 그런 말이 나온단 말입니까? 아저씨가 지금 내 귀를 잘랐잖아요.
그게 뭐? 그게 달라진 거잖아.
이건 폭행이잖아요.
그깟 귀 하나 잘린 거 갖고 뭘 그래? 난 불구덩이에 던져졌는데.
그깟 귀 하나라고요? 불구덩이는 또 뭔 소리예요? 아저씨 미친놈이죠?
이놈이 어르신 보고 미친놈이라니 한쪽 귀마저 잘려야 정신을 차리겠냐?
나는 얼른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양손으로 남은 귀를 움켜잡았다. 이것마저 잘리면 나는 뭘로 소리를 듣겠나. 바닥에 떨어진 귀를 집어들었다.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져가면 봉합 수술을 받을 수 있을지 몰랐다. 손에 느껴지는 말랑거리는 귀의 촉감. 이 귀가 내 몸의 일부였었다는 게 어느새 아득한 과거로 느껴지고 있었다. 아, 내 귀! 울고 싶었지만 공공장소에서 대놓고 울기엔 나의 사회적 체면이 있지. 이 미친 인간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사내를 쏘아봤다. 그는 내 귀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미소를 띠며 무리를 조소하고 있었다.
허허 부질없어.
지금 웃음이 나와요?
허허 내가 웃지 말아야 될 이유라도 있나?
목격자들을 확보하겠다는 심사로 주변을 둘러봤지만, 사내와 나에게 관심을 주는 인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각박한 세상을 봤나. 벌건 대낮에 귀가 잘렸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다니.
경찰서에 가요.
거긴 왜? 뭐 재밌는 거라도 있어?
아저씨 같은 사람은 법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해요.
부질없어.
그 소린 벌써 여러 번 들었어요. 일단 경찰서로 가요.
소용없다니까.
억울하다고요.
됐고 술이나 마시러 가자.
잘린 귀
사내는 내 팔목을 잡고 날다시피 걷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엔 노인에 가까운데 걸음도 빠르고 힘도 여간 센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보폭을 못 맞추고 얼결에 몸을 의지해 버렸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내를 질주했다. 아주 거침이 없었다. 날개라도 달린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앞코 뽀족한 신발 뒤꿈치에는 날개를 연상시키는 장식이 붙어 있었다. 사내가 잽싸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장식용 작은 날개가 파닥여서 그의 걸음에 속력을 붙여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다. 귀도 잘린 판에 사내가 쬐그만한 뒷굽 날개를 움직여 날아간다 한들 뭐 놀랄 일도 아니었다. 한 판 꿈이면 깨면 그만이라는 옆집 알코올중독자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영원히 깨지 않는다면 삶일 테지만, 지금 이 판은 영 꿈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꿈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생생해서 현실이라야 더 적절할 듯도 했다. 이럴 때 생각을 믿어야 할지 감을 믿어야 할지 난감했다.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여기가 어딘가 둘러보니 사내는 어느새 명동성당 뒤편 언덕배기까지 나를 데려온 상황이었다. 그게 어딨더라? 가물가물하네. 사내는 주변을 두리번 살폈다. 한 손에는 잘린 귀를 들고 몸은 사내의 걸음에 의지한 채 나는 엉거주춤 그를 따라갔다. 꿈이든 현실이든 이 상황은 딱히 맘에 드는 것이 아니어서 당장이라도 사내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사내에게 또 한 번 대들었다가는 한쪽 귀마저 잘릴까 봐 겁이 났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노인네에게 저항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기회를 노리다 적당한 시점에 튀는 게 상책일 듯했다. 주변 상점을 여기저기 살피던 사내는 맞아, 여기였지. 하며 사람 하나 간신히 드나들 만큼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고, 벽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가 손 하나가 다시 나와 나의 목덜미를 움켜진 채 문으로 밀어 넣었다. 한손에 결박당한 나는 튀기는커녕 잡힌 쥐마냥 가게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간판도 없는 어둡고 낡은 선술집이었다. 테이블 네다섯 남짓 놓인 실내에는 나이든 노파 혼자 주방 쪽에 서 있었다. 손님은 없었다. 사내와 내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는데도 노파는 반기는 기색 없었다. 손님이 오든 말든 상관없다는 투의 호기로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인상에서 풍기는 기미로 보면 단수가 사내 맞먹을 성싶었다. 시비 걸기 좋아하는 사내조차 그런 노파의 태도에 불만이 없어 보였다. 사내는 유쾌한 표정으로 구석 쪽 테이블에 앉았고, 나는 그의 앞자리에 내키지 않았지만 쭈뼛 앉았다. 노파가 주방 옆에 놓인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고 컵 두 개를 든 뒤 천천히 걸어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소주, 오돌뼈.
사내가 주문을 외치자 노파가 사내를 노려봤다.
왜?
돈 먼저.
없을까봐?
사내가 지지 않겠다는 듯 노파와 눈싸움 한판을 벌였다. 노파의 기세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옥신각신 눈빛 오가는 폼새가 늙은 부부 사이 벌어지는 애정싸움 같았다.
먼저 내.
술 먼저 줘.
나가.
허 참.
사내가 투덜거리더니 이번에는 나를 쳐다보며 눈짓을 했다. 고래 쌈에 새우등짝이 되어 버린 격이었다. 내가 왜요? 하고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사내가 한 번 더 눈짓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지못해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노파에게 건넸다. 돈을 받아 쥔 노파는 그제야 올 때처럼 느릿느릿 구부정한 등을 이끌고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안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허허 하나도 안 변했어.
사내는 이번엔 아주 그윽한 표정으로 주방 쪽 노파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둘 사이 나 모르는 사연이 있을 걸로 짐작되었으나 노인 사이 정분은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왜 사내가 하필이면 나를 끌고 이런 선술집에 왔는지 영문을 몰라 답답할 뿐이었다.
노파가 만들어온 안주는 아주 맛있었다. 사내와 나는 오돌뼈를 오도독 오도독 씹어 먹으면서 단숨에 소주를 비웠다. 사내가 흡족한 듯 외쳤다. 한 병 더. 소주를 새로 시킬 때도 노파 손에 지폐를 쥐어줘야 했고 심지어 노파는 나더러 냉장고에서 직접 소주를 가져다 마시라고 했다. 굴욕감을 느꼈지만, 나는 두 노인네 기세에 꺾여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적응도 빠른 법. 술이 몇 잔 뱃속에 들어가자 나는 좀 느긋해졌고, 고소해 죽겠다는 듯 오돌뼈를 씹어 먹는 사내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뭐 물어봐도 돼요?
뭘?
어디서 오셨어요?
프리울리.
거기가 어딘데요?
궁금하면 찾아봐.
꽤 먼 곳 같은데 여긴 왜 온 거예요?
너 보려고 왔지.
농담 마세요.
농담이 뭔데?
결혼은 하셨어요?
했지. 자녀가 열한 명이나 됐는걸. 그중 넷은 죽었지만.
금실이 좋았나 봐요.
정력이 좋지. 지금도 너끈해.
그러면서 사내는 주방에 앉아있는 노파를 야릇하게 쳐다봤다.
무슨 일을 했는데요?
방앗간 주인이었어. 장사가 꽤 잘됐어. 가이오랑 그리초, 산 로나르도, 산 마르티노 촌장 노릇도 했지. 글을 읽고 셈을 할 줄 알았거든.
잘나가셨네요.
근데 어쩌다 노숙자가 되셨어요? 라 묻고팠으나 혼날 게 두려워 나는 질문을 포기했다.
당연하지. 1581년은 아주 전성기였지.
1581년요? 말도 안 돼요. 그럼 지금 대체 몇 살이란 거예요?
내가 죽을 때가 예순아홉이었지 아마?
죽었다뇨?
아까 말했잖아. 불구덩이에 던져졌다고.
그게 말이 됩니까?
사실인 걸 어떻게 해?
그럼 지금 여기서 오돌뼈를 아그작 아그작 씹어 먹고 소주를 마시는 아저씨는 누군데요?
나지. 메노키오.
(*메노키오는 카를 진주부르그의 책 ‘치즈와 구더기’에 나오는 인물)
그게 아저씨 이름이에요?
진짜 이름은 도메니코 스칸델라야.
어쩌다 불구덩이에 던져졌는데요?
이단으로 몰렸어.
아이고, 미치겠네. 하긴 꿈이면 아저씨가 백 살이든 오백 살이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꿈 같아?
꿈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겠어요.
허허 꿈은 아닐 텐데.
그럼 현실인가요?
중간쯤? 허허 술이나 마셔.
사내는 맛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오돌뼈를 씹고 소주를 홀짝였다. 그러다 대뜸 자네는 신을 믿나? 묻더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태초에 이 세계는 말야. 아무것도 아니었어. 세계는 물, 불, 흙, 공기가 마구 뒤섞인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지. 이 모든 것이 어느 날 하나의 큰 덩어리를 형성하는데 이는 마치 우유에서 치즈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는 것과 같았지. 그 구더기가 바로 천사였어. 그중 가장 강력하고 현명한 존재가 하느님이었던 거지.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불완전에서 완전을 향해 나아갔던 거야. 하느님 역시 혼돈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불완전하기 그지없었지. 하지만 하느님은 혼돈으로부터 질서와 인식력을 얻게 되어서 목수가 집을 지을 때 일꾼을 쓰고도 자신이 집을 지었다고 말하듯, 세상을 만들 때 천사들을 동원했지만 자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태초의 신도 인간도 구더기였다는 건가요?
구더기였지.
그게 말이 됩니까?
중요한 건 구더기가 아니라 혼돈이야.
혼돈이라뇨?
결국 우린 불완전한 존재란 소리야.
비약도 심하십니다그려.
스스로를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그렇죠. 전 지금 한쪽 귀가 없으니까요.
전부터 넌 불완전했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뭐가?
치즈고 구더기고, 거 참 이해 안 가는 말만 골라 하잖아요.
세상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연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죠.
우리 시대에 그런 말은 금기였어. 하느님이 불완전하단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았거든. 게다가 세상을 창조주 하느님이 아니라 천사들이 만들었다는 것도 지극히 오만불손한 생각이었지. 나로 말하자면, 성직자들의 그런 사탕발림을 믿지 않았던 유일한 현자였던 거지.
그는 스스로 대견하다는 듯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대단하시네요. 그래서 이단으로 몰린 겁니까?
재판에 회부되었다가 풀려났지.
다행이네요.
다행이긴 다시 잡혀갔어.
건 또 왜요?
계속 이야기를 하고 다녔거든.
또 구더기 이야기를 한 건가요?
신화에 대한 이야기였어.
아니 그런 괴변을 늘어놨다고 재판에 회부되나요? 도대체 어느 시대가 그래요?
너희 시대 사람들은 당시를 중세라던데.
그럼 아저씨가 중세인이란 거예요?
난 메노키오라니까.
알았어요. 알았어. 요즘 세상엔 신을 믿든 안 믿든 그건 자유예요.
그건 네 생각이지.
현대인들의 생각입니다.
사실 이단 심문 성직자들의 비위를 건드린 이유는 따로 있었어.
뭔데요?
그러니까 말이지.
아 어차피 지어낸 얘길 텐데 무슨 뜸을 그리 들이셔요?
목숨줄 걸린 얘긴데 지어냈겠어?
그렇다 치고요.
며칠째 심문관들 밑에 무릎을 조아리고 조목조목 질문에 답하던 중이었어. 나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 노인네들도 나이가 있으니까 피곤하지 않았겠어? 그래서 마을에서 차지하는 내 지위도 있고 이전에 석고대죄한 이력도 있고 해서 웬만하면 이단은 아니고 그냥 미친 노인네다 하고 풀어주려는 분위기였거든. 아 근데 터지고 만 거야.
뭐가 터져요?
웃었어.
웃었다고요?
웃었어. 장내가 떠나라 호탕하게 웃어젖혔지. 살았다 싶으니까 긴장이 풀리는 거야. 그러면서 평소 하던 대로 머릿속에서 상상이 꼬리를 물고 그려진 거지. 그러다 저들이 성교를 하면 어떤 표정일까 생각이 미치니까 참을 수가 없었어. 일그러진 표정으로 신음을 하면서 오 주여, 주여를 외칠 거 아냐? 나도 모르게 터진 거지.
요즘 시대라면 예스, 예스를 외쳤을 텐데. 어쨌든 쩝 잘못하셨네요. 고등학교 때 저도 수업 중에 혼자 웃다가 교실 밖으로 쫓겨난 적 있어서 알아요. 웃음이 계속 터진 것뿐인데 선생이 저한테 ‘내가 우습냐’라며 화를 막 내더라고요. 사실 속을 들여다보면 선생이 화를 낼 만했죠. 생물 가르치는 노처녀 선생이었는데 자꾸 양말 물고 있는 모습이 상상이 돼서. 결국 복도에서도 웃다가 종아리 스무 대나 맞았어요. 감정이 들어가 있어서 그런지 검붉은 피멍이 일주일도 넘게 안 빠지더라고요. 다음 날부터 졸업 때까지 나만 보면 어찌나 째려보시던지.
다행이네. 난 웃다가 불에 타죽었잖아.
그러니까 자리 봐가면서 웃어야죠. 아저씬 중세인 치곤 참 리버럴하시네요.
웃음이 범부를 악마의 두려움에서 해방시킨다는 진리를 알고 있던 자들이니,(*옴베르트 에코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문장) 웃음은 성직자들이 두려워하는 또 하나의 이단이었어. 웃음이야말로 진정한 땅의 것이잖아. 웃음이야말로 민중들이 소유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지. 윗대가리들은 웃는 법도 모르지만 웃음을 공포스러워해. 불밖에는 막을 재간이 없거든. 그런 면에서 넌 그때 이미 권위에 대한 일종의 저항을 했다고 볼 수 있어. 이제 보니 너 대단한 애였구나!
쩝. 저항이라고 보기엔 어째 구질구질하잖아요.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저항이 뭐 거창한 건 줄 알아? 모여서 노닥거린다고 제대로 된 저항은 아냐.
양말 물고 있는 상상하면서 웃는 것도 뭐 그닥.
승리에 대한 자기 확신이 훗날 폼 나는 저항을 불러온다는 걸 몰라?
시대를 잘못 타고났네요. 저도 중세 때 태어났으면 폼 나게 화형당했을 거 아니에요. 요즘은 웃거나 종교가 다르다 해도 태우진 않으니까요.
차이가 없어.
표현의 자유가 엄연히 보장된다니까요. 법적으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잡아가잖아.
내용이 다르잖아요.
권위에 도전하는 점에선 같지. 여전히 협잡꾼들이고.
아저씨 말은 그냥 미친놈이 떠벌리는 거라 생각할 정돈데, 뭐 땜에 세상이 발끈하겠어요?
뭐 이놈아?
그게 뭐 중요한 내용이라고.
허허 세상이 바뀔 수도 있는 말이야.
구더기가요?
그럼. 세상은 개인의 신념으로 바뀔 수도 있는 거거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세상을 향해 온몸을 던진 장본인이지. 그러니까 너도 완전을 향해 몸을 던져봐.
아까 저한텐 부질없다며 귀까지 잘라놓고서 이젠 구더기로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단 말입니까. 거 참으로 일관되시네요. 쳇.
지팡이가 어디 갔나.
왜 이러세요. 헤헤.
너희들이 중세라 부르는 그 시기엔 하느님의 대리인이라고 행세하는 성직자들 부패가 대단했어. 우리 같은 농민들은 쓰레기 취급을 했지. 재물도 약탈하고 세금도 잔뜩 거둬들이고 말야. 난 그게 영 아니꼬워서 참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책 좀 읽고 세상에 대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지. 그러고 나서 깨닫게 된 거야. 하늘, 땅, 바다, 공기,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세상 만물은 모두 하느님이야. 그러니 귀하지 않은 게 없다는 걸 말야. 우리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우리 각자는 하느님처럼 고귀한 존재란 뜻이야. 나도 자네도 소중하지. 이렇게 쉬운 진리를 중세인이나 요즘 사람들이나 왜들 망각하는지 몰라. 참 돌대가리들이야. 나는 도래하는 세상을 예감하고 있었어. 새로운 신화 말야. 만물에 생명이 움틀거리고 신의 조화가 살아있는 그런 세상을 꿈꿨던 거야.
저희 세상에도 신화가 있긴 하죠. 갑자기 떼돈을 벌거나 높은 자리에 오른 정치인의 성공 신화 같은 거요. 빅 스타가 되거나 돈 없는데 명문대 간 애들은 그 자체로 신화가 되는 거죠. 한 방에! 나머지 개인은 잉여와 잉여 아닌 자로 나뉘어요. 가만히 있으면 정교한 기계가 되거나 돌이 될지도 몰라요. 전 그게 두려워요. 둘 다 싫거든요.
인간은 물질로 환원되지.
영혼은요?
올라가는 영혼과 안 올라가는 영혼으로 나뉘지.
차라리 영혼이 없단 편이 낫겠어요.
사실 나도 좀 헷갈리긴 해.
공부를 제대로 했어야죠. 인간이 죽으면 빛으로 환원된다는 티베트인들의 믿음이 더 그럴 듯해 보여요.
본업에 충실하느라 책 읽을 시간이 많진 않았어. 방앗간에서 마을 사람들과 떠들다가 저녁엔 주점에 가서 떠들며 복음을 전파한 거지. 좋다. 그럼 난 죽어서 소주가 되고 싶어.
죽었다면서 뭘 또 죽어요?
세상이 다르지.
아아 모르겠어요.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 빼곤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모든 것에 무관심해지는 건 모든 것에 무관심해지지 않을 한 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세상이 바뀌는 걸 경험하고 싶어?
그러니까 광장에 나왔죠. 나한테 과연 그런 게 남아있기나 한지 모르겠어요.
보여줄까?
아저씨를 어떻게 믿어요?
내가 어때서?
폭행에다 금품 갈취까지 해놓고 저더러 지금 믿으란 말입니까?
허허 당한 것의 몇 배는 보상이 될 거야.
안 믿습니다.
이놈아, 모르겠어?
뭘요?
세상이 바뀌려면 세상을 갈아타야지. 한 병 더!
이렇게 해서 메노키오와 나는 세 병째 소주를 비웠다. 마지막 잔을 목구멍에 밀어 넣었을 즈음에는 그도 나도 얼큰하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술이 오르니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해대는 사내가 흥미 있게 여겨지기도 했다. 어디서 이런 소리를 듣겠는가. 천사니 구더기니 하는 이야기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생각한 공상에 불과하지만, 그의 위풍당당한 태도에는 그럴 듯한 풍류가 있었다. 이제껏 나는 주변 눈치나 보며 살아온 것 같은데 이자는 노숙자로 살지언정 자기 신념을 갖고 있다는 게 대단한 호기 아닌가. 그렇다고 사내에 대한 긴장을 풀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오른쪽 주머니 속에는 여전히 잘린 귀가 들어있었고, 이곳을 나가게 되었을 때 다시 광장으로 돌아갈지 집으로 갈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라 고민스러웠다. 무시하는 듯 쳐다보는 그의 표정이 떠오르기도 했다. 허름한 선술집의 침침한 백열등 아래 앉아있자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꿈 안인지 바깥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돌뼈가 너무 맛있었기 때문인지 그의 이야기가 마약 같이 현실을 잊게 해주어서인지 알 수는 없었다. 마지막 잔을 비운 메노키오가 호탕하게 웃더니 탁자 위에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슬슬 가볼까.
이제 집에 가는 거예요? 라고 묻는 내 질음에 대답은 않고 그는 노파만 흐믓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노파는 아까부터 파를 다듬고 있던 참이었다. 이 인간은 남의 무관심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표정으로 노파에게 물었다.
들어간다.
파를 까던 노파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우리 편을 쳐다봤다. 째려봤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노파는 나를 사납게 살피더니 시선을 돌려 다시 파 까기에 집중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 표정을 짓든 괴팍한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메노키오가 중세인이라면 저 노파는 그럼 마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노파의 얼굴이며 표정이 한층 강렬하게 다가왔다. 둘 다 화형당했을 것 아닌가. 그래선지 둘의 관계가 정열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메노키오는 노파를 향해 실실 웃으며 말했다.
들어간다.
그제야 노파는 파를 까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약속 지켜.
알았어.
메노키오는 신이 난 표정으로 일어나 성큼성큼 앞장을 섰다. 그는 들어온 문이 아니라 주방 쪽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나더러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그를 따라가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선 이미 수긍한 상태라 이번엔 별 다른 꼼수를 부리지 않고 잠자코 뒤따랐다. 튀어봤자 또다시 덜미를 잡히게 될 건 뻔했고 이젠 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저 문을 밀고 들어가면 우락부락한 사내 둘이 내 양쪽 팔을 붙잡고 어딘가로 데리고 갈지도 모른다. 그곳엔 수술대가 놓여 있고 나는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로 간이며 콩밭을 적출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둘의 약속은 내 장기를 판 수익의 비율? 4대 6이라든지 7대 3이라든지. 결국 노파와 메노키오는 장기매매단의 한 패거리일지도, 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를 만나 이곳에 들어온 이후 나는 신기한 감흥에 사로잡혀 긴장이 풀린 상태라 어떤 상황이든 이전보다 낯설긴 하겠지만 참혹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죽어 있는 사람과 죽지 않는 사람의 차이랄까. 죽을 사람도 아니고 살 사람도 아닌 자와의 동행은 광장과는 다를 테니까. 어쨌든 이곳은 안심을 주는 심정적 동요가 있었다. 그가 소리 나게 문을 열었다. 이전과 다른 무언가가 내게 다가올 거란 예감에 나는 몸을 떨었다.
세 번째 가슴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방이 막힌 방안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곳은 작은 촌락을 입체적으로 꾸며놓은 스튜디오 세트장 같았다. 그렇게 따지자면 엄청나게 큰 방이라 볼 수 있었다. 가운데로 난 길을 중심으로 양편에 2, 3층으로 올린 목조 건물들이 오밀조밀 붙어 있었다. 주변은 어둑했지만 음침하지 않았다. 조도가 알맞은 은은한 실내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건물 앞에는 여자들이 서 있거나 앉아있거나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거나 했는데, 하나같이 알몸이었다. 왜 다들 벗은 채 집 앞에 서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제야 짐작이 됐다. 여긴 창녀촌이었다. 그렇다는 확신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집 앞에 서 있는 나체의 여인들은 창녀들인 셈이었다. 이런 창녀촌은 처음이었다. 정육점 불빛이라든지 탑에 미니스커트 차림을 한 긴머리 여자들만 봤지 이렇듯 야생의 미인들이 나체의 생생한 육체를 드러내고 있는 창녀촌은 상상도 해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고갱이 지냈던 타히티 섬에서 모셔온 듯 건강한 구릿빛 육체를 가진 여성들도 있었다.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세월의 더께로 그악스런 느낌이라기보다 푸근한 엄마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 자애로워보였다. 창녀촌 같지 않은 창녀촌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창녀촌을 여러 곳 다녀봤다는 건 아니다. 나는 아름다움이나 살의 경험이 거래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믿어달라. 흠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매혹적인 육체들은 성욕을 자극한다기보다 경건에 가까운 감동을 주고 있었다. 그런 모습들이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겸연쩍어 고개를 숙이다가를 반복했다. 그가 나를 이런 곳에 데려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여인들에게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앞장서 걸으며 뒤통수만 보이는 메노키오가 중얼거렸다.
세상이든 나든 먼저 살아야지.
저한테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럼 저 여자들한테 말하는 거냐. 머리만 살아있는 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 여태 왜 그러고 살았냐. 그럴 거면 차라리 나처럼 세상에 반항하다 화형이나 당하지. 그렇게라도 했으면 산 채 죽진 않았을 거 아냐. 하긴 스스로 별볼일없다고 생각하는 처지에 그럴 용기나 있었겠어. 변화는 언감생심? 넌 열두 달 광장에 있어도 달라지지 않아. 부질없다고.
구구절절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말씀이 너무.
너무 뭐?
신랄도 하시네요. 또 그 부질없다는 말씀은 지겹기도.
새겨들어. 안 그러면 넌 평생 머리뿐인 채 살다가 돌덩어리가 되어서 누군가의 발부리에 채여 가루가 될 테니까. 요즘 애들은 너무 약해 빠졌어.
그래서 광장에.
시끄러!
메노키오는 내가 영 못마땅한지 혀를 끌끌 찼다. 나는 더는 뭐라 반항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풀이 좀 죽었다가 다시 여자들을 보고 활기를 내다가 이거 뭐 하나 싶어 부끄러워졌다. 감정이 그야말로 들쭉날쭉이었다. 그러다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라 망설이다 메노키오에게 물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나요?
다 왔어.
메노키오는 끄트머리 건물을 가리켰는데, 가까이 가보니 선술집 노파가 그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좀 전에 파를 까던 걸 보고 왔는데 어떻게 우리보다 더 빨리 여기 와 있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노파 역시 메노키오가 신고 있는 날개 달린 신발이라도 신고 있는 건가 해서 발을 들여다봤는데 웬걸, 노인은 그저 시골 장터에서 구입할 수 있는 평범한 털신을 신고 있었다. 그렇다면 장치도 쓰지 않고 축지법을 쓰나. 메노키오보다 한수 위란 말인가. 메노키오는 노파를 발견하고는 주책맞게 껄껄 웃더니 물었다.
손님 없지?
노파는 아까처럼 그를 쳐다보는 대신 또다시 나를 째려보는 거였다. 거 참,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못마땅하면 그냥 가라면 될 일이지 팍팍한 할망구였다. 나를 쳐다보는 노파를 향해 메노키오는 여전히 자기 할 말만 늘어놓았다. 누가 더 무심한지, 누가 더 이기적인지 내기를 하면 백 년이 지나도 결판이 안 날 듯했다.
아까 봤잖아. 돈도 있어. 약속 지킬 테니 염려 말라고 허허.
그러더니 메노키오가 나에게 대뜸 말하는 것이 아닌가.
들어가 봐.
어딜요?
2층으로 올라가면 돼. 여기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야. 한눈에 반해버릴 걸.
하면서 메노키오가 내 등을 툭툭 밀어내는데, 이번에는 노파가 메노키오를 째려보며 또다시 말 단단히 해뒀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메노키오는 뭘? 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껄껄 웃으면서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하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지킬 게 있어.
뭔데요?
세 번째 가슴은 안 돼.
세 번째 가슴이요?
가보면 알아. 절대로 만지면 안 돼. 알았지?
그보다 할 말이 있는데.
나중에 해.
중요한 말이거든요.
얼른 올라가 봐. 시간 없어.
메노키오는 내 등을 밀며 계단으로 오르라고 종용했다. 마지못해 내가 계단을 오르다 아래를 보니 메노키오는 노파와 이미 어딘가로 들어가 버린 상태였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인가 얼떨떨해진 나는 계단을 내려가 여길 빠져나갈까 잠시 고민했다. 메노키오도 사라졌겠다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다가 맞은편 건물 앞에 서 있는 나체의 여인 둘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 여자들이 손짓을 하며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너무도 매력적인 미소를 보내면서 말이다. 여자들을 보는 순간 나는 여기까지 온 이상 한번 경험해보자 하는 용기가 생겼고, 결국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2층으로 올라갔다. 복도 끄트머리에 방이 보였다. 손을 뻗어 사과 모양의 문고리를 돌리고 문을 밀었다. 빛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눈앞이 환해졌다.
자연광만으로도 충분히 밝은 방이었다. 침대와 옷장, 화장대로만 이루어진 단출한 가구들이 놓여 있었고,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여자가 침대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방문을 열 때 소리가 나지 않아 여자는 내가 방안으로 들어왔는데도 잠이 깨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자고 있는 여자를 들여다봤다. 메노키오의 말이 사실이지 싶었다. 여자는 매혹적이었다. 앞 건물에서 나를 부르던 두 여인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여기서 현실 비현실 따질 처지가 아니지만, 여자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육체를 가졌다고밖에는 표현 못할 지경이었다. 베아트리체를 본 단테의 첫 느낌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 순간 나는 지고의 행복을 본 듯했다.’ 잠든 여자의 얼굴에는 갖가지 표정이 모여 있어 아무리 들여다봐도 당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은 채 사색에 잠겨 있는 듯도 했다. 여자의 얼굴에는 신비와 슬픔이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할 즈음 평온이 느껴졌고, 천진함이 느껴진다고 생각할 즈음 요염함이 느껴졌다. 육체도 마찬가지였는데, 육감적이라고 생각할 즈음 이제 갓 성숙한 소녀의 이미지가 떠올랐고, 만지고 싶다는 성욕과 동시에 관조하고 싶은 욕구가 동시에 떠올랐다. 여자의 육체에서는 식물과 동시에 동물이 떠올랐고, 열기가 일어나는가 싶더니 촉촉한 안도감이 감싸주는 듯했다. 하나의 이미지와 동시에 뒷모습까지 드러내는 묘한 대조가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 놀라움 속에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가 눈을 떴다. 눈이 마주쳤다. 움찔 한 발짝 물러섰다. 여자는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나를 보고 놀라기는커녕 평온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당신이군요.
아 안녕하세요. 저는 그러니까 남자, 아니 여자, 남자. 메노키오가 올라가라고 해서 주무시는데 노크도 하지 않고. 죄송합니다.
당황한 나는 무슨 얘기를 떠들어대는지 알지도 못하고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자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살피다가 나직이 말했다.
귀 한쪽이 없네요.
아까 잘렸답니다.
어쩌다가.
그자가 이상한 지팡이로 내리쳤는데 귀가 떨어졌지 뭡니까. 정말 무서운 노인네예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알고 싶어서 여기 온 건가요?
내 발로 들어왔으니 그렇다고 해야겠죠. 하지만 전 제가 여잔지 남잔지조차 잊어버렸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아까 메노키오에게 그 얘기를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가 들어가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여기 이렇게 서 있게 된 거예요.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르죠.
웬걸요. 예전에는 아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귀가 잘렸을 때 모든 방향을 상실해버린 것 같아요. 그렇지만 당신을 만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저도 만나고 싶었어요.
정말인가요?
그럼요.
저를 알고 있었나요?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저를 알고 있었을까요?
당신이 저를 찾았으니까요.
저는 당신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는걸요.
당신의 상처가 저를 불렀어요.
상처라고요?
10년의 상처든 20년의 상처든, 그 이상의 시간이 스민 상처든 당신의 몸은 혹은 머리는, 가슴일지라도 받아들여질 수 있답니다. 스스로 포기하지 않으면요, 포기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흐르는 존재임을 믿는다면 알 수가 있어요. 잘린 귀는 이제 잊어버리세요. 그리고 당신을 제게 맡기세요.
그녀의 대답을 듣는 순간 행복감에 젖어서 나도 모르게 그녀와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과 닿는 순간 향긋한 풀 냄새가 풍겨왔고 이후부터 나는 생각이라는 것을 해야 할 아무것도 없어졌다. 여자의 입 속으로 내 혀가 들어갔을 때 나는 이전의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의 켜로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 혀는 그녀의 입 안으로부터 목을 타고 넘어 그녀 몸 어딘가로 깊이깊이 흘러갔는데, 그녀의 육체가 줄기로 되어 있다는 것을 혀가 닿는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 혀는 그녀의 몸을 통해 줄기 안으로 더듬거리며 들어갔고, 뿌리 마디마디에서 수액이 올라와 목을 타고 넘었다. 수액에서 풍기는 향기와 싱그러운 촉감, 갈증을 해갈해 주는 그 맛은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달디 단 맛이었다. 눈을 감고 혀를 통해 그녀의 몸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뿌리에 다가가 내가 그토록 바라던 생기를 흡수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떠올라 몸을 떨었고, 결국 그녀의 몸속에 혀를 깊이 박은 채 부끄럽게도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 감았던 눈을 떴을 때 나는 알몸이 된 채 그녀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내 손은 그녀의 매끄러운 등 곡선을 지나 엉덩이를 지나갔고, 허벅지와 종아리를 쓰다듬던 손길은 양쪽 가슴에 도달했다. 그때 나는 그녀의 봉긋한 젖무덤 아래에서 무언가가 조심스럽게 돌출하고 있음을 만질 수 있었다. 그건 마치 땅을 뚫고 나오는 죽순처럼 느리고 기품 있게 일어나고 있었다. 입술을 떼고 황홀감에 젖어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머리를 가슴으로 내렸다. 그러다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세 번째 가슴이 그녀의 양 가슴 아래에서 솟아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개의 젖은 그녀의 몸 움직임에 따라 파르르 흔들렸다. 조화로웠다. 나는 오래전부터 결심했던 것처럼, 아무 흔들림 없이 그녀의 세 번째 가슴에 입술을 가져가 빨기 시작했다. 어딘가에서 세찬 열망이 뛰는 심장 소리와 함께 발끝까지 치닫고 있었다. 놀란 그녀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울음들
안 돼요.
그녀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에 나는 번쩍 놀라 세 번째 가슴에서 입을 떼었다.
당신 것이 아니에요.
누구 건데요?
아이를 위한 거예요. 내 아이 말고는 누구도 빨 수가 없어요. 어째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거죠?
그녀는 내가 야속하다는 듯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본 다음 얼굴을 묻은 채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흐느낌은 너무도 여리고 여린 것이어서 나는 그녀가 한숨에 가까운 고음을 낼 때는 너무 놀라 울음을 따라하기조차 했다. 그 울음마저 내게는 격정을 일으키는 게 안타까울 노릇이었다. 스스로 어리석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메노키오가 내게 한 말을 그저 건성으로 듣고 넘겨버린 거였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번에서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내게는 너무 소중해져 버린 그녀가 우는 것이 돌덩어리처럼 딱딱해진 내 마음의 어느 지점을 건드린 것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또 다른 울음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황급히 일어나 창가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인들의 울음이었다. 창녀촌의 모든 여인들이 집 바깥으로 나와 알몸의 몸을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다. 집안에서 여인들이 계속 밀려나와 그 수만큼 울음으로 채우고 또 채웠다. 그 광경에 놀라 심장이 터질 듯 요동을 쳤다. 모든 것이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탓이었다. 여인들의 울음은 격랑의 강처럼, 끊어짐 없는 노래처럼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것이었다. 당신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겠는가. 여인들의 울음 바로 곁에 내가 이토록 전율하고, 내게 지고의 행복을 느끼게 해준 세 개의 가슴을 가진 여인이 울고 있었다. 사실 내게는 다른 여인들의 울음이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해주기는 했지만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울음은 달랐다. 그녀의 울음은 내 마음 깊은 지점을 건드리고 있음을, 그것이 어쩌면 내겐 최초의 건드림일지 모른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또 하나의 감정이기도 한 것이어서, 어떻게 해서든지 여인의 울음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약속을 지키는 것만큼 확고한 무엇을 나는 그녀 앞에서 보여줘야만 했다.
결심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주머니에서 꺼낸 그것을 말없이 내밀었다. 아이처럼 울고 있던 여자가 나를 쳐다보다가, 내가 내민 그것을 한 번 더 쳐다보다가, 시간이 강처럼 흐르고 난 뒤 내 손에서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나의 오른쪽 귀를 당연한 듯 입안으로 가져가 씹어 먹기 시작했다. 나의 일부이자 지금은 떨어져 나가 봉인된 귀는 오도독 오도독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씹히고 있었다. 그녀의 몸안으로 들어간 나의 귀는 깊은 나무의 관을 관통하여 뿌리 밑으로 스며들어 그것을 성장하게 할 양분이 될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뿌리에서 스며나오는 수분은 세 번째 가슴을 빨아먹는 그녀의 아이를 건강하게 해주리라. 어쩌면 꿈을 꾸게 해줄지도 모르리라. 그러면 그녀는 비로소 나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줄 것이다. 나는 그녀의 오도독 오도독 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 눈을 감았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찔끔 나와 부끄러운 마음에 얼른 얼굴을 훔치고 그녀가 내 귀를 씹는 소리와 바깥 너머 창녀들의 노래에 가까운 울음의 흘러감을 천천히, 회상하듯이 주의 깊게 들었다.
눈을 떠보니 울음은 우연히 왔듯 그렇게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 역시 울음을 멈춘 채 조용히 앉아있었다. 세 번째 가슴도 그녀 몸 안의 줄기 속으로 사라지고, 그녀는 다른 여인과 다름없이 두 개의 가슴을 가진 여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느꼈다. 여전히 그녀는 내게 소중한 존재였다. 그녀는 또 다른 나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의 심장은 어떤 조짐으로 세차게 뛸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몸이 달라붙어 하나가 될 것처럼 껴안았다. 시간이 이야기처럼 흐르고 흘러갔다.
사과 모양의 문고리를 돌린 다음 그녀의 방을 나왔다. 그녀는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내려가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는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알몸인 채 나를 향해 미소를 띠던 창녀들도, 독살스럽게 노려보던 노파도, 도무지 그 속을 알 수가 없는 메노키오도 보이지 않았다. 청명한 새벽의 여운처럼 공기는 신선함으로 감돌았고, 나는 천천히 주변을 바라보며 걸어갔다. 이윽고 메노키오가 안내하던 문이 나타났고, 처음 열 때처럼 그 문은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을 열자 백열의 선술집 실내가 드러났는데 노파도 손님도 없었다. 메노키오와 술을 마시던 자리에는 빈 술병과 접시 따위가 그대로 놓여 있어, 그와 내가 과거를 함께 했다는 흔적을 상기시켜 주었다. 선술집을 나와 보니 밖은 느닷없이 시끌벅적한 인파들로 들썩였다. 밖은 환한 낮이었다. 명동 거리에는 삼삼오오 모여 식당과 술집으로 들어가는 사람들과 물건을 파는 상점을 기웃거리는 젊은이들로 넘쳤다. 밤에 들어가서 낮에 나온 셈이지만, 시간이 조금도 흐르지 않은 듯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산책하듯명동 거리를 얼쩡거렸다. 사실상 나는 걸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했다. 선술집에서 낯선 그곳으로 문을 연 이후 언제 어디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갑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물증은 없지만 범인이 메노키오라는 심증은 확고했다. 그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노인네는 지금쯤 노파와 내 지갑 안의 지폐를 4대 6으로 할지 7대 3으로 할지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터였다. 지독한 노인네들! 그러니까 화형이나 당하지. 그렇게 중얼거리니 더욱 우스워져서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 시선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킥킥거리면서 걸었다. 그러다 순간 이미지 하나가 떠올라 나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방, 침대 아래에서 보았던 그 무언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나는 그제야 깨달았고 그 자리에서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털신! 털신이었다. 그러니까 가슴 세 개를 가지고 있는 나의 아름다운 피앙새는 파를 까던 그 노파. 아니 마녀가 아니었던가! 그러고 보니 그녀와 오랜 시간 입을 맞추었을 때 나던 그 향기로운 냄새에 야릇한 파냄새가 섞였던 것도 같았다. 우웩. 전봇대를 부여잡고 주저앉고 말았다.
광장은 여전했다. 여전히 무관심했고 나처럼 소외감 느끼는 자들이 많아 보였다. 진작 알았더라면 메노키오를 따라가지 않고 왕따들끼리 모아 작당이라도 벌일 걸 그랬나 보다 싶었다. 자기들끼리 연식 속닥이는 무리들을 바라보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냈다. 그에게 전화를 거는 순간에서야 나는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잠시 후 퉁명스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어디냐.
광장.
여직이냐? 너도 참 한심하다.
그는 연신 씹어대고 있었다. 오징어나 육포 따위의 질긴 무언가인 듯했다. 그가 씹는 대상은 나 아니면 오징어나 육포 따위의 질긴 무언가가 대부분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티브이 채널 바꾸는 소리가 들려왔다. 관객들의 폭소가 터져 나왔다.
언제 올 건데?
안 가.
갈 데나 있냐?
상관 마.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
언제까지 그럴 건데? 너도 참 한심하다. 전화를 끊어 버렸다. 씹었다. 씹기. 그것이야말로 가장 분명한 나의 대답이 될 수 있음을 이제야 알게 되어 흡족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씹어줄걸! 대꾸를 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에 대한 기대나 실망과 같을 테니까. 어쩐지 홀가분해진 심정으로 무리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어딘가가 분명 환해진 듯했다. 건드려 툭 터진 여드름 같은 기분. 그의 상처는 후시딘이 처리해줄 것이다. 새살로 돋게 해주는, 호랑이연고 다음으로 신비한 연고! 다행이었다. 그때였다. 눈앞으로 허연 무언가가 불쑥 디밀어졌다. 시선을 내려뜨리니 하얀 국화꽃 한 송이였다. 이건 또 뭐? 멍하니 꽃을 바라만 보고 있으니 꽃이 위 아래로 한 번 흔들렸다. 내민 자가 받으라고 내게 꽃을 흔든 탓이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인지. 참 열심히도 흔들어대고 있었다. 결국 꽃을 받아 들었고, 내게 꽃을 내민 사람을 쳐다보았다. 자루. 이번에도 자루였다. 그는 자루 같은 망토를 뒤집어쓴 게 아니라, 자루 같은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왜 그런 것 있잖나. 모자가 달리고 허리께를 끈으로 묶은 뒤 발 밑까지 길게 늘어뜨린 짙은 갈색 성직자복. 휴우. 나는 한숨을 한 번 쉰 다음 그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메노키오와 달리 그의 말투는 정중하고 침착했다.
변했죠.
그렇다고 변한 건 아니지요. 여전하니까요.
여전하죠.
모자를 벗은 그는 희끗한 흰 머리에 불 주변으로 우묵한 주름이 져 있었고 짧게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손에는 내게 준 꽃과 똑같이 생긴 국화꽃 다발을 들고 있었다. 꽤나 잘생긴 호감형의 외모를 가진 그는 내려놓은 자에게서 볼 수 있는 차분히 빛나는 눈을 지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법 없이 살 것 같은 천사표 이미지였다. 그 역시 사람 좋아보이지만 광장에 어슬렁대고 있다가는 노숙자 취급을 받을 터였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메노키오가 떠올라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은 땅에서 사는 자의 특권이지 허허. 내가 킥킥 웃자 그가 눈을 조금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선한 기운이 얼굴 전체를 감쌌다. 나는 처음 메노키오에게 했을 때와 달리 여유롭게 말을 건넸다.
아저씬 누군가요?
조르지오 부르노라고 합니다. 자연철학자지요. 성직자이기도 하지만요.
(*조르지오 부르노는 롬바흐 ‘아폴론적 상상력과 헤르메스적 상상력’에 소개된 인물)
중세 사람이죠?
그렇습니다.
미치겠네요.
저 땜에 당황하셨다면 미안합니다. 전 그저 꽃을 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셨겠죠. 아저씨도 화형을 당하셨나요?
그걸 어떻게 아셨나요? 예전에 우리가 만났던 적 있었나요?
그럴지도, 아닐지도 모르죠. 그게 뭐 대순가요?
그렇긴 합니다만.
그러면서 부르노는 자신의 생각을 내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신은 무한히 많은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그 세계들은 각자 자신을 넘어 다른 것과 관련 맺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창조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시간, 정신, 물리적으로 서로를 가로질러 나아갈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지요.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세계가 존재하며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답니다.
그래요?
그런데 어쩐지 제 얘기를 진지하게 안 들어주는 것 같아 슬퍼지는군요.
아니, 전혀 아니에요. 보는 순간부터 전 아저씨가 맘에 들었는걸요.
음. 아저씨라는 호칭은 듣기 민망하군요. 이왕이면 저 귀 좀.
부르노는 자신이 도망자 신분이기 때문에 넓은 광장에서 얼굴이 노출되면 위험하다고 내게 귀띔하며 자신을 수사라 부르길 요청했다. 그녀들은 누굴까? 부르노의 명징한 눈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생각이 떠올라 그를 향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 갈게요.
어디를요?
만나러요?
누구?
여인들이요. 같이 가실래요?
물론입니다.
부르노는 흔쾌히 나와 동행했다. 우리는 또다시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나의 사랑하는 여인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울음의 노래를 위해 나머지 한쪽 귀마저 잘라서 기꺼이 내어 주리라. 날개 달린 신발을 가진 자와 날듯이 뛰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나와 브르노의 의지와 천천히 걷고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몸이 살아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