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학생과 이탈리아, UNWTO 본부 인턴 CV 작성하기
1.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UNWTO(유엔세계관광기구) 본부에서 메일이 왔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인턴을 할 수 있다면 가능한 기간과 CV(Curriculum Vitae)를 보내주면 좋겠습니다. 현재 교환학생 기간 일정도 알려주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나는 메일을 보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고 답한 뒤, 빛의 속도로 CV가 될 만한 것을 찾아 살피기 시작했다. 노트북을 잠시 덮고 창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유럽 국제기업에서 작은 경험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2. 딱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없었지만, 최대한 지도 밖으로 행군하려고 시도했다. 존스홉킨스대학에서 교육 과정을 끝내고, 얼마 전에 미국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한 사촌 누나가 떠나는 내게 해준 조언이다. ‘한국 안에서 할까 말까 할 때는 하지 말고, 한국 밖에서 할까 말까 할 때는 불법적인 게 아니라면, 도전을 두려워하지 마.’ 젊으니까 방황해도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경험이라는 단어로 자신을 용서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밖에 나갔을 때, 학생의 처지로서 한국에서는 하기 어려운 것들에 관해 계속해서 고민했다. 애초에 유럽 곳곳 관광지를 다니면서 사진들을 찍고 싶었다면 배낭 메고 편한 마음으로 여행을 왔을 것이다.
3. 그런데 머리가 복잡하다. 유럽 CV는 어떻게 써야 할까. 학교 커리어 센터에 가서 질문을 하려고 했으나, 안내서를 들이밀며 4주 전에 예약해야만 상담할 수 있단다. 그렇다면 나의 CV 샘플들을 몇 개만 봐주실 수 있는지도 물어보니, 4주 후에 봐주겠단다. 참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탈리아다. 결국, 이탈리아 대학 친구들과 선배들에게 요청했고, 샘플들을 받아 볼 수 있었다. 우수 샘플들을 보니 대충 감이 잡혔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자기소개서나 CV, 포트폴리오를 작성할 때는 강력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숨을 몰아쉬며 배를 내밀어댔으나, 배가 보이지 않았다. 배가 너무 고팠던 나머지, 그 배에 들어있던 욕망, 불안, 약간의 바람과 허세, 다시 안쓰러움까지 다 빠져나갔나 보다.
4. 밀라노 로렌테지오(Lorenteggio) 거리 대로변에서 조금 들어가 인도에 자리한 그렇게 크지 않은 규모의 정육점. 겉보기에는 그냥 동네에 하나씩 있는 흔한 정육점 같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곳은 늘 고기 맛 좀 안다는 마니아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사람이 언제나 늘 몰려있기에 궁금하여 밀라노 토박이인 룸메이트 집주인에게 물어보니 이미 밀라노에서는 ‘고기 장인’으로 소문이 나 있단다. 정육점 사장님이 다양한 고기 부위를 신선하게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칼솜씨가 장난이 아닌 걸로 유명하다. 언제 한 번 꼭 가보리라 마음을 먹었고, 나는 집중력이 필요한 그 순간에 그곳으로 발길을 향했다.
5. 짧은 백발의 아저씨 한 분과 내 또래의 선글라스를 낀 젊은 청년이 있다. 딱 봐도 부자 관계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육점 벽면에는 백발 아저씨와 이탈리아 유명 연예인들이 함께 찍은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또, 이탈리아 지역별로 목장과 고기들을 정리한 지도들도 눈에 들어왔다. 나는 삼겹살이 먹고 싶었던 나머지, 삼겹살이 있는지 물었다. 청년은 영어로 준비해서 주겠다고 답했고, 백발의 아저씨는 이탈리아어만 하실 수 있으니 본인이 통역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아버지는 이탈리아어를 못하는데 고객들이 그걸 더 이탈리아 고기 장인으로 쳐준단다. 괜히 말을 섞었다가 그 부자의 끝없는 무용담을 듣게 될까 봐 염려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뭔 소리야? 국제 마케팅 시대에 무슨 영어를 못하는 게 이탈리아 고기 장인이야?’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이탈리아인 외에도 정말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있었다. 전부 이탈리아어로 주문하지 않고, 아들 청년을 통해 영어 혹은 스페인어로 주문했기 때문이다. 정말 이탈리아 밀라노 고기 장인으로 소문이 나 있나 보다.
6. 나는 괜히 정육점에 놓인 고기들을 구경하는 척하며 5분 동안 몇 명의 손님이 오는지 확인했다. ‘토끼고기, 말고기, 소고기, 당나귀 고기….’ 5분 동안 8명의 새 손님이 들어왔다. 그리고 줄을 서서 내 고기를 썰고 있는 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넨다. “Buonasera! (좋은 저녁이야)” 그리고 세 명의 사내는 식당에 가져갈 고기들을 트럭에 옮겨 담았다. 나는 궁금해서 슬쩍 말했다. “장사가 잘되네요!” 그러자 선글라스를 쓴 아들이 계산하다가 아니라며 엄살을 부리면서도 체인 업체가 몇 개라며 가게 자랑을 마다하지 않았다. “고기가 맛있나 봐요.” 그러자 아들은 고기 맛이 일품이라며, 우리 아버지는 이탈리아 밖을 한 번도 나가지 않았고, 이탈리아 스타일로 도축, 숙성 등 모든 걸 이탈리안 스타일로 하니까 더 제대로 된 이탈리아 고기를 즐길 수 있을 거란다. 아버지가 영어를 못해 아쉽지만 고기엔 누구보다 자신 있으니 영어 못해도 더 자신 있다고 말을 뒤이어 계속했다. “영어 잘하는 정육점은 밀라노에 많지만, 우리 아버지처럼 이탈리아 스타일 그대로 고기를 손질하고 파는 가게는 우리 가게뿐이에요.”
7. 나는 계산하며 여기서 가까운 곳에 사는 동네 주민이고, 앞으로 자주 오겠다는 허언이 아닌 진담을 남기고 정육점을 나섰다. 그 순간 개인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칠 때, 그걸 그냥 강점화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단점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걸 인정하고 오히려 자신의 강점을 더 밀고 나가는 것이다. 단점이라 생각되는 것을 약간 변형시켜 강점과 결합하면,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또 다른 가능성이 새롭게 열린다. 밀라노 정육점 1등 아저씨가 영어를 못하는 걸 인정하고, 고기에 더 집중하여 가치를 높였고, 고기 장인이 된 것. 신화에 가까운 이 정육점 사장님의 이야기에서 배운 교훈은 인정은 적극적이고 현명한 대처 방법이라는 것이다.
8. 집으로 돌아와 고기를 냉장고에 넣어놓고선 바로 책상 앞에 앉아 CV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나는 유럽인이 아니지만, 동서양에서의 다양한 경험과 수상 경력을 통해 국제 관광정책을 접했을 때,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다는 강점들을 위주로 CV를 구성했다. 며칠이 지난 뒤, 이것저것 생활하며 바쁘게 지내고 앉은 밤의 내 책상, 진동이 울려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UNWTO에서 다시 메일이 와 있었다.
“11월 2일에, 12시로 방문을 예약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메일을 확인하고 나는 묘한 만족감에 젖어서 침대로 뛰어들었다. 오늘은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 한번도 대학생을 UNWTO 본부에 초대한 적이 없다고 하여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정육점 아저씨가 말한 ‘위기를 기회로! 단점을 강점으로!’가 효과를 발한 것 같다. 행복하냐고? 그건 잘 모르겠다. 그렇게 크고 거창한 단어로 함축된, 포장 가득 행복은 바라지도 않는다. 오늘같이 그저 순간순간에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찰나가 인생에 자주 있기를 바랄 뿐이다.
‘마드리드행 11월 1일 7시 50분에 출발하는 항공을 예약했다. UN! 그것도 본부! 어떤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책에서,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수 있던 유엔은 어떤 곳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