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학생과 이탈리아, 취미_밀라노 주민들의 연극을 보고 오다
1. 나는 정말 길치가 맞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데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재차 확인하며 확신했다. 집 앞에 있는 놀이터를 보고 난 후에야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내가 사는 동네 놀이터는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다. 나무판자와 담배꽁초, 빈 와인병, 상자 등이 곳곳에 버려져 있었고, 아이들은 숨바꼭질하며 깔깔 웃어대고 있었다. 즐거워 보였다. 나무에 올라가고, 상자 안에 숨는 아이들을 향해 나의 시선을 고정했지만, 머릿속은 과거의 나의 어린 시절을 유영하고 있었다. 나도 어릴 적에 특히 외할머니집에서 숨바꼭질을 사촌들과 많이 했었다. 어수룩한 공간과 마당, 마루 밑이나 창고에서 옛날 물건 같은 것들을 찾았을 때 느낀 짜릿함이 있었다.
2. 일상적인 생활공간으로부터 비일상적인 공간을 찾아 도피하고자 하는 욕망의 꿈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겠다. 단순하지만 술래로부터 숨었다가 신기한 물건들을 발견했을 때 가벼운 흥분을 잊을 수 없다. 생활공간에서 잊힌 것들이기에 새로운 장난감처럼 더욱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요즘은 나와 사촌들은 학교에 다니고, 직장에 들어가 철저하게 계산되고 기능화된 그 생활 루틴을 벗어나지 못해 그때의 밝은 웃음소리를 듣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됐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라고 소리치면서 놀던 어린 우리의 그 숨바꼭질 노랫소리도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3. 어릴 때 명절날 사촌 누나, 형들과 숨바꼭질할 생각에 들떠 있던 그 아이의 설렘은 찾아볼 수 없고, 되려 묵묵히 외할머니집으로 운전해 고속도로 위를 달리던 부모님의 모습 같았다. 도로 표지판에는 속도 표시와 거리를 나타내는 숫자들이 적혀있고, 가끔 휴게소의 위치가 나왔다. 내비게이션도 오차 없이 오로지 목표만을 위해 최단 거리로 달려가라고 줄곧 외쳐댔다. 지금은 물론 한국 반대편 국가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으니 날마다 다채롭고 새롭지만, 이 또한 적응될 것이며 나는 한국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는 침대서부터 시작해, 밥을 먹는 식탁에서, 공부와 일 등 생활하는 공간, 그런 일상의 자리로부터 나를 감추고 새로운 공간을 찾아내고 싶다. 나는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어디로 도피할 수 있을까?
4. 그 해답을 오늘 집주인의 연극에서 찾았다. 나와 같은 지붕 아래 다른 방에 사는 룸메이트이자 집주인은 이탈리아인이며, 직업은 세무사다. 그는 우리 아버지와 동갑인데 연극과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매일 같이 일이 끝나면 취미는 소중하다고 구시렁거리며 잠시 집에서 쉬다가 바로 연극을 연습하러 갈 정도다. 소극장에 살림을 차렸나 싶을 정도로 취미에 열정적인 집주인이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Sei personaggi in cerca d'autore)’이라는 연극을 하니 내게 보러 오라고 말했다. 밀라노 주민들이 주를 이뤄 취미로 각색해 소극장 무대에서 막을 여는 것이다. 열정적으로 취미 생활하는 그의 작품이 궁금했고, 주민들이 모여 만든 작품은 어떨까도 궁금했다.
5. 연극이 끝나면 그에게 주기 위해 12유로에 붉은 꽃다발을 샀다. 밀라노 공대에 교환학생으로 온 다른 한국인 친구와 함께 보러 갔는데, 그 친구도 노란 꽃다발을 들고 왔다. 콧노래를 절로 흥얼거리며 Alta Luce Teatro 극장으로 가는 길, 나빌리오 운하는 참 예뻤고 핑크빛과 보랏빛 그 사이에서 물감처럼 퍼지는 저녁 태양의 색도 참 아름다웠다. 길을 가는데 꽃 때문일까. 마치 내가 누구에게 사랑 고백이라도 하러 가는 줄 아는지 손뼉을 쳐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분 좋게 문을 열고 소극장 하얀색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우리는 발밑에 조심히 꽃을 내려놓고 관람했다. 모든 게 이탈리아어로 빨리 진행되기에 대사에 의존해 맥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래서 상상을 더 해 배우의 손짓, 표정에 더 집중해 흐름을 따라갔다.
6. 소극장에서 함께 취미로 연기하는 배우들, 또 그걸 취미로 관람하러 오는 관객들. 연극도 무대에서만 이뤄지지 않고, 스테이지, 관객석 주변, 내려와 출입구까지. 관객들은 웃고 낮은 소리로 연극에 관해 얘기하고, 모두 하나 되어 펼치는 연극이었다. 내가 본 배우들은 밝은 조명 아래 마이크도 없이 열변을 토하듯 연기하는 아마추어들이었다. 그 아마추어들의 취미에 대한 열정이 내겐 꽤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원래 아마추어란 말은 라틴어 ‘아마레(amare)’에서 유래됐는데, 이는 ‘사랑하다’라는 뜻이다. 지금, 이 순간을 묘사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아마추어이기에 더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할 수 있는 연극이었다. 그러니 배우들 발걸음 울림소리부터 관객들의 웃음, 환호성에 떨리는 목젖의 울림까지, 이 모든 분위기를 아마추어해!
7. 연극이 끝나고서 우리는 집주인에게 꽃을 건넸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꽃을 안겨주니 집주인은 처음에 꽤 당황해했다. 알고 보니 이탈리아에서 꽃을 줄 때는 사랑 고백할 때 주는 게 대부분이란다. 한국에서는 보통 연극이나 콘서트에 초대되면 꽃을 들고 간다고 하니 한국인들은 정말 달콤하다며 주변 배우들에게 막 자랑했다. 관객 중 한 무리는 한국인은 엄마 배에 있을 때 나이도 한 살로 인정해주는 정말 따듯한 것 같다며 갑자기 나를 극찬했다. 이 역시 꽃의 힘이니라. 극장 밖에서는 주스, 와인, 콜라 등 마실 것을 컵에 따라줬다. 이를 마시며 주민들끼리 배우와 관객이 연극에 관해, 취미로 만나 취미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연극에서도 삶에서도 무대는 관객과 배우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을 때, 더욱 의미가 있고 빛나는 것 같다.
8. 이 순간만큼은 다들 행복해 보였다. 집주인도 일 가기 싫다며 종종 장난삼아 투덜대는데, 극장에선 아주 귓가에 입꼬리가 걸렸다. 연극을 마치고선 한 중년 여자가 무대에서 막 울며, 남편이 돌아가셨는데 그와 함께 연극이란 취미를 공유했단다. 또, 이 취미로 그 슬픔을 견디며 앞으로도 계속 남편과 했던 취미를 하며 남편을 그리워할 거라고 말하는데, 우리를 비롯한 관객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손뼉을 쳤다. 그게 취미의 힘인가 보다. 익숙한 삶 속에서도, 아무리 힘든 고통 속에서도, 잠시 일상화된 현실 문제에서 벗어나 도피할 수 있는 곳. 내 아픔을 위로해주는 하나의 취미. 사랑하는 이와 공유할 수 있는 취미, 허공에 내미는 손을 잡아주는 취미 하나. 그런 작은 취미가 있으면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간 열정적인 취미 생활을 해본 적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