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밥 먹었어?” 교실의 자리에 앉자마자 친구들에게 물었다. 기존 ‘식사 여부’는 한국인의 아침 인사가 되어버린 지 오래인데, 한 이탈리아 친구는 당황해하며 너는 매번 그걸 왜 물어보냐고 되물었다. 친구 제네로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식사에 아주 진심이지만, 그렇게 묻지 않아”라고 말했다. “그건 자신의 취향에 따라 개인적인 식욕을 채우고 본인이 해결해야 할 사적인 일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그걸 계속 확인하는 것이 인사말이라니까 그는 두 눈을 크게 뜨고서 놀라며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곤, 난 네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식사 여부를 묻길래, 식품영양학과를 전공하는 줄 알았어.”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참을 킥킥거렸다.
2. 수업이 끝나고, 나는 학교에서 제일 친한 이탈리아 친구들인 니콜과 마지, 모니카, 버지니아와 함께 피자를 먹으러 갔다. 그들은 내게 밀라노에서 제일 맛있는 피자집에 가서 제대로 된 피자를 먹게 해주겠다며 자신만만하게 기대하라는 말을 연신 반복했다. 밀라노에서 평생을 나고 자란 버지니아가 밀라노 두오모 부근에 있는 피자집을 예약했다. 나는 사실 다른 맥락으로 크게 기대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바로 베개를 베고 자버리는 나에겐, 수면욕이 식욕보다 중요해진 지 한참 지났다. 그런데도 내가 큰 기대에 부푼 이유는, 식사 양식만큼 그 나라의 문화양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놓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 식당에 들어서니 이탈리아 나폴리 전통 방식대로 피자를 만들어 주는 진짜 맛집인 식당이었다. 식탁에는 포크와 나이프가 미리 세팅되어 있었고, 우린 냅킨을 무릎 위에 펼쳤다. 앞치마를 두르고 높이 솟은 흰색 ‘토그 브랸슈(Toque Blanche)’, 일명 요리사 모자를 쓴 주방장이 와서 범인 조사하듯이 자세하게 피자의 종류와 양, 그리고 음료는 어떤 걸로, 몇 병을 원하는지 주문받았다. 이탈리아에서는 한국과 달리 각자 하나의 피자를 흔히 먹는다는 친구들의 말에 나는 마르게리타 피자를 보통 크기로 시켰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인 한식집에 가면 식사 메뉴와 그 양은 처음부터 주인이 알아서 준비해 한 상이 차려져 나오는데, 여긴 달랐다.
4. 한데, 다른 점은 또 있었다. 화덕에서 갓 구워진 피자를 보니 한국의 피자처럼 잘려 나오지 않았다. 프랑스 작가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서양인이 식사 시 사용하는 포크가 본질적으로는 동물의 ‘발톱’과 다를 게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포크와 나이프는 음식을 찢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다란 피자가 통째로 직접 접시에 오른다. 친구들에게 이에 관해 물어봤다. “만일 손님이 요청하지 않았는데, 요리사가 친절을 다해서 손님이 먹기 좋게끔 피자를 미리 여러 조각으로 썰어오는 건 어떻게 생각해?”
5. 이탈리아 친구들 모두가 자기 특권을 침해당한 듯이, 그때는 손님이 불평해도 정당하다고 했다. 내 입안에 넣는 크기는 남이 정해주는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내가 정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또, 피자는 잘라서 나올 때 빨리 식을 수 있기 때문에 본인의 마음대로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잘라먹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걸 손님이 특별히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요리사에게 마음대로 자를 권리는 없다고 했다. 이게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유럽 서구의 자아이며, 미디어에서 수없이 접한 서구의 ‘자유정신’이기도 했다.
6. 내가 한국에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나’에 대해서 확실한 칸막이를 두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과 조금씩 얽혀 있어서 어디까지가 ‘나의 영역’인지, 또 어디까지가 ‘너의 영역’인지 그 관계가 애매하고 불확실함에 가까웠다. 식당 아르바이트하면 그 광경을 확실히 볼 수 있다. 손님들은 알아서 안주를 가져오고 맥주는 ‘한 두어 서너 병’ 가져오라고 시키는 경우가 꽤 있다. 자기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인 식사를 타자인 ‘너’에게 내맡기는 것이다. 그 권한을 맡은 ‘나’의 입장에서는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없는 난처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한 두어 서넛’은 ‘하나둘 셋 넷’의 준말이니 도대체 몇 병을 가져가야 하는가.
7. 그렇게 되면 ‘너’가 먹을 것과 입맛, 그리고 양을 다 ‘내’가 결정해 줘야 한다. 그래서 식당 자영업자들은 눈치 빠른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고 싶어 한다. 왜? 계산은 손님 중에 누가 하는지, 뭐 때문에 밥과 술을 사는 건지, 무슨 자리인지 등을 다 종합적으로 짐작해서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생의 눈치로 ‘한 두어 서너 병’은 두 병이 될 수도 있고, 네 병이 될 수도 있다. 또, 안주 메뉴도 달라진다. 아르바이트생으로서 조금 시간이 지나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리는 이심전심의 직관이 길러진다. 나중에는 손님의 관상까지 보며, 소매치기할 것도 아닌데 손님의 주머니 속을 짐작해 들여다본다. 친구들은 나의 얘기를 듣더니 한국인만의 초능력, ‘눈치’에 관해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 하니, 그들은 영국의 데일리 메일과 일간 메트로에서 이에 관해 긍정적으로 보도한 것을 읽어본 적이 있던 것이다.
8. 데일리 메일은 눈치가 한국인들이 가진 초능력으로, 이는 초자연적인 능력이라기보다는 다른 이의 생각과 기분을 순간적으로 파악하는 절묘한 기술이라고 소개했다. 이렇듯, 어렵고 타자와의 관계가 불편한 순간도 있을 수 있지만, 이 얽히고설킨 ‘나’와 ‘너’의 관계는 쌀쌀맞고 이기적인 자아가 아닌, 권커니 잣거니 하는 따뜻한 ‘정’으로 뭉친 한국만의 문화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인사말부터 해서 식사법도, 모두 서로 ‘다른’ 것들이 참 많이 보인다. 다름이 있어서 소통이 필요하고, 불완전해서 만남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면 나는 너로 인해 ‘또 다른 나’로 변하고, 너는 나로 인해 ‘또 다른 너’로 변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이야말로 ‘다름’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진정한 ‘상생 원리’가 아닐까 싶다.
▲ 이탈리아에선 적잖은 사람들이 오징어 게임 문구가 적힌 후드티를 입고 다닌다. 친구, 린이 후드티를 입고 온 날에 함께 찍었다.
밀라노 거리마다 정겹게 들리는 BTS의 노래 <Dynamite>, 수업 시간에 미디어 예시로 가장 많이 등장한 드라마 <오징어 게임>, 이탈리아 서점 인기 코너에 자리한 소설 <파친코>. 이처럼 친숙한 것과 낯선 것을 버무리고, 부드러운 것과 딱딱한 것, 서로 다른 것들을 한데 섞어 새로운 것을 탄생하는 기술은 한국인의 유전자 깊숙이 박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