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곤 Mar 24. 2023

4. 고급 호텔에서 받은 에르메스 회장의 편지

교환학생과 이탈리아, 아르마니 호텔 밀라노에서 느낀 부러움

1. “호텔의 투숙객이신가요?” 아르마니 호텔 밀라노의 경비원이 내게 물었다. 차만 마시러 왔다고 말하자 친절하게 7층에 있는 카페(Bamboo bar)를 안내해줬다. 밀라노에 오기 전에 찾아뵌, 1.3세대 유학생 출신 지인이 해주신 말씀이 있다. 스위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선진국에 갔을 때 거기서 가장 좋은 호텔이나 백화점에 가서 차를 한잔하라는 것이다. ‘이 동네, 여기서 제일 잘나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하는 걸 한번 가볍게 보라는 말씀이셨다. 그분의 조언으로 난 팔자에도 없던 하룻밤에 300만 원이 조금 넘는 고급 호텔의 라운지 바에 갔다. 카페에 들어서니 예상보다 더 화려하고 로비는 깔끔했다. 나는 차를 한 잔 시키고서 본격적으로 관찰을 시작했다. 나를 제외한 모두는 중년 이상의 서양인이었고, 라이프 스타일 매니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니 분명히 그들은 호텔의 투숙객일 것이다. (아르마니 호텔은 투숙객의 사생활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예약 확정 후 라이프 스타일 매니저를 배정해주는 대표적 특징이 있다)


2. ‘이 동네에서 제일 잘나가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오로지 내 관찰에 기반하여 그들의 공통점을 적어봤다. 첫째, 말은 항상 높은 톤이 아닌 낮게 한다. 그리고 천천히 말한다. 둘째, 움직임은 천천히, 동작 하나하나 빨리 움직이는 게 없다. 느긋하게. 여기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은 웨이터뿐. 셋째, 웃을 때는 상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작은 소리로 하하하 웃는다. 넷째, 음식을 먹을 때는 다리를 꼬지 않는다. 다 먹고 등을 기대 다리를 꼰다. 등을 댈 때도 느지막이 기댄다. 다섯째, 옷은 단색으로 튀지 않게 입는다. 또한 브랜드가 크게 각인된 옷을 입은 사람도 없다. 여섯째, 액세서리로 자신의 개성을 표하나 너무 과하지 않다. 일곱째, 행동에 이어 제스처도 느리되, 크게 한다. 여덟째, 천천히 입을 닫고 음식을 씹는다. 아홉째, 남들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는다. 내 음식, 내 앞에 있는 대화 상대만을 바라보고, 그 외에는 고개를 잘 돌리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남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땐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다. 다만, 곧이어 자기가 말할 땐 잘 웃지 않고 명확하게 의사를 전달한다.

    

3. 열 가지의 공통 특징들을 적는데, 앞 테이블에 홀로 있는 중년의 남성과 연신 눈이 마주쳤다. 젊은 동양인이 혼자 앉아서 뭘 쓰고 있으니 그는 궁금했는지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인간을 서로 연결하는 말로 시작해 우리는 대화를 나눴다. 서울에도 몇 번 와본 적이 있다는 그는 미국의 유명 패션 월간 잡지 임원이었고, 호텔 투숙객인데 저녁 약속까지 시간이 좀 남아 여기서 가볍게 칵테일을 한잔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듣는 와중에 인간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곳의 풍경은 한국이든 미국이든 유럽이든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부러워요! 저도 당신처럼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내가 부럽다고 하자 그는 입가를 실룩이며 “나는 살날이 얼마 안 남아서 곧 이러다가 죽어. 나처럼 살지 마.”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속에 담긴 배려와 유머에 그의 모습에서 알찬 기운을 느낄 수 있었고, 그런 그의 에너지와 분위기가 부러웠다.


4. 그래서 물었다. ‘당신처럼 성공하고 싶은데, 내게 조언해 줄 수 있냐고?’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는 네가 부럽다. 젊잖아. 얼마나 꿈이 많고. 꿈을 꾸는 인생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멋진 건 자기 자신이 되는 거야.” 그리고 그는 자기 젊을 때가 생각난다며 편한 마음으로 최대한 많이 경험하라고 덧붙여 말하며 파일철에서 꺼낸 흰색 종이 한 장을 내게 건네줬다. 에르메스 회장인 악셀 뒤마(AXEL DUMAS)가 쓴 편지였다. ‘With a light heart, anything is possible.’이라는 간결한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그 글에는 에르메스 도장과 함께 악셀 뒤마의 사인이 담겨있었다. 아마 어디 잡지에 실었던 에르메스 회장의 글인 것 같았다. 이걸 왜 주냐고 물어보니, 젊은 너에게 필요한 말 같단다. 그리고 그는 누군가와 전화해야 한다며 검지와 중지를 꼬아 Good luck 손동작을 내게 보이며 카페를 떠났다.


5. 이탈리아에 오기 전, 연합뉴스에서 인턴을 할 때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한 판사님이 샌디에이고로 몇 년간 연수를 가기에, 떠나기 전 가까운 기자들과 모여 점심으로 송별회를 했다. 마침 한 기자분께서 일정 문제로 참석을 할 수 없었고, 그날 인턴을 관리하던 기자님께서는 그 공석에 나를 데려가 주셨다. 그 자리에서 기자님들은 가족과 함께 해외에 가서 생활할 수 있는 판사님을 부러워했고, 판사님은 부담 없이 젊은 나이에 혼자 이탈리아로 떠나는 나를 부러워했다. 반면에 나는 해외 이슈들을 취재하여 뉴스에서 보도하는 기자님들이 정말 부러웠다. 참 웃기게도 기자님들은 판사님을 부러워하고, 판사님은 나를 부러워하고, 나는 다시 기자님들을 부러워한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며 ‘그 사람처럼 되기’를 바랄 때, 같은 맥락으로 다른 사람은 나를 부러워할 수도 있다.


6. 에르메스 편지에 쓰인 첫 문장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나의 속내를 들여다보았다. 내가 꿈꾸는 ‘성공’은 ‘다른 사람처럼 되기’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선망하는 대상, 성공한 사람처럼 출세하여, 좋은 옷을 걸치고, 맛있는 걸 먹으며, 부러운 그들처럼 화려하고 부유한 생활을 하는 것. 그만한 행복이 또 없으리라고 단언했었다. 하지만, 사람은 늘 자신과 다른 새로운 무엇, 자신에게 없는 것을 부러워하고 동경한다. 그 임원과의 대화는 내게 새로운 물음표와 느낌표를 줬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만 보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잊고 놓쳐 온 건 아닐까? 그렇다. 다른 사람을 부러워할 게 아니라, 내가 세상에 가지고 태어난 것들과 진정한 나의 내면을 더 살뜰히 살펴볼 일이다!


7.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임원이 떠난 테이블엔 노인과 어린아이가 앉아 다정하게 말을 하고 있다. ‘grandpa(할아버지)’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들리는 걸로 보아 영어권 국가의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인 것 같다. 손자의 과자 취향을 물어보는 할아버지와 듣기평가 하는 아이처럼 말을 끊어가면서 조곤조곤, 한편으론 또박또박 자기 의사를 밝히는 손자의 목소리가 따뜻했다. 그들의 모습을 관찰자의 시점으로 바라보니 참 따뜻하고 정겨웠다. 나도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나의 손주들과 밀라노의 전망을 한 눈에 보며 쿠키를 먹고 싶었다. 아, 나는 아직 멀었나 보다. 순간 또 부러울 뻔했다. 손주는 내 선택이 아닌 나의 미래 자녀들의 선택이자 그들의 몫이므로, 나는 훗날 나의 아이들과 그런 정겨운 순간이 내 삶에 녹아있길 희망하며 카페를 떠났다.


8. “미래 나의 딸아 혹은 아들아, 쿠키는 맛있니? 24살의 아빠는 오늘 여기서 큰 가르침을 얻었단다. 당시의 아빠는 늘 다른 누군가를 부러워했고, 그 누군가가 되고 싶었거든. 그렇게 선망이 심해지면 모방하게 된단다. 잘못된 모방은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어 아빤 가끔 이불킥도 몇 번 한 것 같구나. 그러니 너 역시 남을 부러워하며 그들이 간 길을 똑같이 가려 하기보단 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네가 가진 것을 잘 가꿔나가렴. 너 자신을 믿고 그 길을 좇아보렴. 사랑한다.”

이전 03화 3. 나빌리오 : 친구들과 함께한 행복 가득 아페리티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