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학생과 이탈리아, 내가 서울 대신 밀라노에 온 이유
1. 오렌지색 칵테일 아페롤 스프리츠(Aperol Spritz)에 뜬 얼음들을 빨대로 어지럽게 휘저은 뒤 한 모금 쭉 들이키곤 주위를 살폈다. 길게 늘어져 있던 그림자는 온데간데없어졌고 그 위로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신나는 음악과 가게의 불빛들에 둘러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하는 사람들을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이곳은 나빌리오 운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설계한 인공운하로 그 세월의 역사와 젊음이 공존하는 매력적인 거리이다. 나빌리오 운하를 중심으로 수많은 술집과 레스토랑, 아담한 갤러리와 사람 냄새 나는 공방들이 은은한 불빛을 내며 줄지어 있다. 우리는 어둠 속 밝은 불빛 일부가 되어 이탈리아 북부의 식전주 문화인 아페리티보(Aperitivo)를 즐겼다. 나빌리오엔 다양한 스타일로 아페리티보를 제공하는 식당들이 있다. 우리는 칵테일을 주문하면, 해피 아워로 피자부터 라자냐, 살라미를 비롯한 다양한 음식을 원하는 대로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뷔페 스타일의 식당에 갔다.
2. “그래서 네가 밀라노에 온 진짜 이유가 뭐야?” 러시아 친구 R이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던 내게 물었다. 부드럽기 그지없던 스파게티가 갑자기 고무줄 같았고 아무리 씹어도 씹히질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번에 이어 이번에도 말하지 않는다면 묵비권과 뭐가 다르겠는가? 동시에 이 친구들은 나의 이야기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했다. 기차에 탔을 때, 오른쪽 창가에 앉은 사람과 왼쪽 창가에 앉은 사람은 내다보는 풍경이 다르다. 같은 기차를 타고 지나는데도 한쪽은 강을 보고, 한쪽은 숲을 볼 수도 있다. ‘한국과 다른 곳에서 온 이 친구들은 나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고,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이야기했다. “나는 인서울 대학 편입시험에 합격했는데, 포기하고 지방대학에 남기로 했어. 남의 시선 때문에 서울로 대학을 옮기는 건 싫었어. 대신에 정말 유럽 4대 경제도시(밀라노, 마드리드, 런던, 파리) 중 한 군데에 살아보고 싶어서…. 그래서 왔어!”
3. 나는 차가운 술잔을 다시 입에 가져가 입술만 살짝 닿게끔 한 뒤 친구들에게 설명해줬다. 한국에서의 서울, 그리고 지방대학과 지방소멸의 현실에 대해서 말이다. 한국에서는 다수의 친구와 선배들은 내게 기회가 훨씬 많은 서울로 무조건 오라고 했다. 어른들은 내게 한국 사회에서는 대학교 총장의 직인과 번호가 찍힌 학사 졸업장이 공장에서 나온 완제품의 일렬번호처럼 평생을 따라다닌다며, 네가 어려서 뭘 모르니 꼭 서울로 가라고 핀잔을 줬다. 너무 답답해 대한민국의 유명 앵커를 찾아갔을 때, 그는 편입을 꼭 하라고 거듭 당부했다. 어쩌면 애초에 잘못 만들어진 불량 양팔 저울 같았다. ‘지방대학’이라는 ‘비수도권’이라는 키워드가 바닥에 너무나 강하게 붙어서 반대쪽에 엄청난 노력으로 무엇을 아무리 많이 쌓아 놓아도, 절대로 수평이 되지 않는 저울 말이다. 비수도권에 살고, 지방대학에 재학한다는 사실이 내가 꿈을 꾸는데 늘 나를 불량 저울로 만드는 것 같아서 편입시험을 보고자 열심히 공부했다.
4. 결국, 역대 대통령과 유명 언론인들이 졸업한 인서울 대학 편입학 시험에 합격했다. 합격통지서를 받고서는 합격했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했지만 허무하기도 했다. 지역 활성화에 언론으로 이바지하고 싶은 내가 단순히 학벌 세탁을 위해 서울로 떠난다면, 평생을 남들이 만들어낸 좌표와 그에 따라오는 속성들에 휘둘릴 것 같았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살지 못하고 기성적 사고와 관념에 제약받은 채로 안주하며 기뻐하는 그런 사람이 될까 봐 겁이 났다. 나의 머리로 생각하고, 나의 방향대로 살고 싶었기에 합격 후 포기를 했다. 부모님께서는 아들의 결정을 지지해주셨고, 나의 가까운 지인들은 나를 응원해줬다. 그들의 응원에서 나의 뇌를 강하게 때리는 아이디어가 순간적인 감탄사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으로 유명한, 유럽의 대도시 그것도 4대 경제도시에 있는 대학교 중 한 곳으로 교환학생을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소 즉흥적으로 이탈리아 밀라노 교환학생에 지원했다.
5. “이곤아, 너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라고 들어봤니?” 프랑스에서 온 교환학생인 차노가 자동 반사처럼 나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물었다. 내가 모른다고 답하니 그는 침을 꿀떡 삼키고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파블로 카잘스는 스페인 출신 사람이지만, 내전 이후 집권한 프랑코 독재 정권에 저항하며 프랑스의 아주 작은 지방 도시인 프라드로 왔다고 한다. 카잘스는 프랑코 정권에 모호한 태도로 일관한 모든 국가의 초청 공연을 거절하고 프라드에서만 지내며 그 밖을 나오지 않았다. 그런 카잘스를 그리워하는 세계 각지의 음악가들이 프라드에 모였고, 1950년 제1회 프라드 음악제를 개최했다. 이 음악제로 산골의 작은 마을이었던 프랑스의 프라드는 세계 음악의 중심지로 주목받게 되었다. 차노는 “진짜 중심은 너라는 사람이지, 네가 머무는 지역의 위치가 될 수 없어”라며 “‘지금 여기’가 네 생활의 중심이며, 성공의 무대인 거야! 너 분명히 성공할 거야”라고 말해줬다.
6. 그의 말을 듣는데, 나는 그제야 나만의 공간이 생긴 아이처럼 자유로움을 느꼈다. 알딸딸한 술기운 때문인지 얼굴이 붉어지는 게 느껴졌고, 술잔을 들고 바라보는 강가의 풍경은 내게 아늑한 편안함을 안겨줬다. 이 인공운하는 끝이 보이지도 않는 게 꼭 불과 몇 달 전까지 방황했던 나의 모습 같았다. 나빌리오 운하는 전성기에 롬바르디아 지역의 강과 호수, 도시를 연결하는 150km 길이의 네트워크를 형성했다고 한다. 나빌리오 운하를 따라 대량의 대리석이 밀라노 대성당 건축을 위해 운반되었고, 이 운하는 농업 생산량 증진을 위한 관개수로이자 밀라노를 상공업 중심으로 이끈 주요 운송로의 역할을 똑똑히 해냈다. 이렇게 큰 역할을 한 나빌리오 운하의 물은 중심과 주변을 차별적으로 나누지 않고, 조용히 오늘의 문화를 만들며 천천히 이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다.
7. 술 한 잔 가격으로 푸짐한 저녁을 즐기고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콧노래가 나왔다. 나는 흥얼거리며 아까 술집에서 본 낡은 방명록 노트에 누군가가 써 놓은 레오나르도 다비치의 명언을 떠올렸다. “진정한 친구란 그늘에서는 잘못을 책망하고 밝은 곳에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다.” 친구들의 말과 응원이 고마웠다. 어두컴컴하고 늦은 밤까지 밝은 불빛에 둘러앉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지구 반대편 친구들과 나눈 오늘을 나는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아페리티보를 즐기며 먹었던 해피 아워의 무한 리필 음식처럼 계속해서 각자의 행복한 상상, 꿈들을 공유했다. 다행스럽게도 상상들은 웃음이 막 터져 나올 정도로 많이 해도 공짜였으니까. 우리의 소소하고 따뜻한 이야기들이 오늘의 거리를 환하게 밝혔다.
8. 인생의 행복이란 좋은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들을 함께 나누며, 좋은 음악을 듣고 그렇게 즐겁게 보내는 것이 아닐까? 그게 서울이든, 밀라노든, 춘천이든, 어디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