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학생과 이탈리아, 출국길_글을 시작하며
1. 가족과 진하게 포옹하고 난 뒤, 교환학생 비행길에 올랐다. 아쉬운 마음에 게이트로 가는데도 몇 번이고 더 뒤를 돌아 손을 흔들었다. 교환학생에 붙었을 때 기뻐했던 기억이 있는데, 엄마와의 포옹 때문일까, 뭉클한 마음에 괜히 손에 든 여권과 항공권을 더 꽉 움켜쥐었다. 새로 만든 여권은 빈칸들로 가득했다. 이 빈칸에는 어떤 도장들이 찍힐까? 빈칸으로 가득한 젊은 청춘일 때, 해외로 나가 살아보라는 어른들의 조언보다도 통장의 빈칸 자체가 이미 자유와 도전보다는 부담으로 다가와 학기 중 일주일에 네 번씩 아르바이트했던 날. 글로벌 투자그룹에서 교환학생 장학금을 받고 뛸 듯이 기뻐했던 날. 연합뉴스 인턴을 하면서도 책상 위에 이탈리아 관련 책을 쌓아놓고, 자투리 시간마다 이탈리아어를 조금씩 공부했던 날. 이탈리아 대사관에 수없이 메일을 보내며 비자 관련 문의를 했던 날. 여러 날을 떠올리며 인천 공항 2 터미널을 통과했다.
2. 13시 40분. 말펜사 공항으로 향하는 대한항공 직항 비행기에 탔다. 게이트를 통과하고 34F 좌석에 앉아 승무원분들의 친절하고 밝으면서도 다소 인위적인 미소를 보니 슬슬 실감이 났다. “나, 이제 진짜 가는구나. 교환학생…. 잘 해낼 수 있을까?” 기대 반, 걱정 반. 머릿속에는 ‘교환학생’과 ‘꿈’이라는 단어로 가득 차 있었고, 이 두 가지 조합이 주는 부담과 긴장에 체한 듯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막연한 즐거움을 품고, 여행자의 신분으로 비행기에 타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여행 배낭을 메고 신나게 비행기 좌석에 앉아있었던 때와는 꽤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서일까? 좌석에 벨트를 매고 앉아있는 모든 순간이 나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
3. 비행기가 활주로를 세게 달리더니 비행기 바퀴가 한국 땅에서 떨어졌다. 비행기가 붕 뜨는 그 느낌을 전두엽이 아닌 척추신경으로,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비행기는 천천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승무원들은 비행기가 뜨기 전 모든 장비와 좌석을 꼼꼼하게 확인했고, 누군가가 움직이려 하자 재빨리 제지했다. 비행기 좌석에 놓인 간이 책상도 다 접어놓으라고 했다. 승무원들의 심각한 표정과 탑승객의 깊은 침묵. 귀가 먹먹한 지금, 그야말로 이 뜨는 과정이 긴장 최고조 비행이 아닐까 싶었다. 약 5분 정도 지나자, 먹먹했던 귀는 정상으로 돌아왔고, 탑승객은 간이 책상을 비롯해 모든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승무원의 친절하고 안정감 있는 부드러운 미소를 볼 수 있었고, 그들의 입꼬리도 다시 올라갔다. 비행기는 성공적으로 날고 있었다. 잘 날기 위해서는 먼저 잘 떠야 하는 것일까?
4. 엄마가 어릴 적, 불러주신 노래가 생각났다.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어릴 때부터 나는 “뜬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요즘도 자주 사용한다. 중등학교 때 아이돌을 좋아하던 친구들은 “쟤가 요새 좀 뜨더라”라고 자주 말했고, 고등학교 때는 사설 인터넷 강의 과목들과 브랜드가 뜬다는 말을 빈번하게 썼다. 대학교 때 미팅에 나가서는 우리에게 “나 좀 띄워줘라.”라고 말하는 동기도 있었다. 이외에도 연예계, 정치계, 재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뜬다’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그리고 나는 해가 뜨듯 ‘아, 나도 뜨고 싶다’라는 다짐도 이따금 하곤 한다. 그 명성과 인기를 차지할 때 ‘뜬다’라는 단어를 잘 사용한다. 하지만, 뜨는 것만큼이나 무섭고 위험한 게 또 있을까?
5. ‘뜨다 : 물 속이나 지면에서 가라앉거나 내려앉지 않고 물 위나 공중에 있거나 위쪽으로 솟아오른다.’ 뜬다는 것은 억누르는 중력에서 벗어나 갑자기 솟아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비행기 창가로 보이는 구름은 잘 떠 있다. 자기 의지와는 별개로 바람에 끌려다니다 사라진다. 승무원들이 따라준 구아바 주스에 올라온 거품은 컵의 움직임에 따른 물결대로 떠다니다가 터져버렸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떴다가 사라지는 게 아닌, 이 밀라노행 비행기처럼 높이 높이 날고 싶다.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을 향해 날개를 펴고 떠 있는 구름 사이를 헤쳐 꼿꼿이 날아가고 싶다. 뜨는 것은 외부 자극에 의한 것이나, 나는 것은 내부 자체 동력에서 그 힘이 비롯된다. 비행기는 아무리 햇빛이 강렬해도, 바람이 불어와도, 그저 잠시 내려 쉬었다 가지 절대 해와 바람을 탓하지 않는다.
6. 갑자기 ‘타다다다’하는 소리가 들렸고 이는 나를 흥분시켰다. 음료와 와인, 커피 및 다과를 실은 수레가 통로를 따라 지나가는 소리였다. 수레바퀴가 구르다 멈췄다. ‘탁!’ 배가 딱히 고프지도, 목이 마르지도 않았지만, 수레 소리에 품기 마련인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나는 그 소리에 홀려 커피를 석 잔씩이나 주문해 마셨다. 그리고 교환학생을 확실하게 결심한 날에 구매한 이탈리아 관련 책들을 꺼내 읽어갔다. 책 중 형광펜이 칠해진 글씨를 보니, ‘지오반니 바티스타 단티(Giovan Battista Danti)’였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날개 장치로 비행 실험을 시도하다 추락한 사람이다. 날고 싶다는 그 꿈을 향해 본인의 목숨을 기꺼이 걸고 시도하는, 그 열정에 감동하여 형광펜으로 여러 번 그 이름을 그었던 기억이 있다. 그 옆에는 조그만 메모가 적혀있었다. ‘나는 내 꿈을 위해 내 목숨을 걸고 도전했던 적이 있던가. 그저 남들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 살아남을 궁리만 하고 있던 건 아닐까. 그런 내 젊음이 부끄럽다.’ 메모를 다시 읽어봤다.
7. 나는 이제 이탈리아 교환학생이라는 새로운 기류 위에 떴다. 6356 마일을 더 가고, 10시간이 지나면 나는 밀라노 땅을 밟는다. 이제 자유롭게 나의 힘으로, 나의 머리로, 나의 몸으로, 내 자체 동력으로 날아야만 한다. 부모 탓, 사회 탓, 남 탓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나의 손으로 국가를 선택해 시험을 봤고, 모든 과정이 나의 자율을 바탕으로 해서 교환학생으로 이탈리아 위를 자유롭게 날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의 국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생활하며! 나만의 색깔을 찾고 진하게 색칠하고 싶다. 그렇게 나의 의지로 주관대로 남이 뜨든 말든 손가락질하든 치켜세우든. 나의 속도로, 나의 시선으로, 나의 색깔로 꾸준히 날고 싶다!’
8. 지금 이 글을 쓰고 갑자기 감정이 벅차올라 온몸에 에너지가 흐르는 느낌이다. 이제 시작이구나. 가자!! 시계를 보니 아직 비행한 지 한 시간도 안 지났다. 활기찬 에너지가 온몸에 흐르는 게 아니라 이코노미석에서 다리를 오므려 앉아있어서 쥐가 나 찌릿찌릿한 거였다. 진정하자, 아직 9시간하고도 40분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