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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Sep 14. 2024

성민이는 한 대 맞았다.
지독한 첫사랑에게.

스물다섯. 첫사랑의 기억

성민은 한 대 맞았다. 지독한 첫사랑에게 말이다. 첫사랑의 아픔을 잊는 방법은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겠지만, 성민은 내가 본 그 누구보다 처참히 망가지는 방법을 택했다. 스무 살 중반. 젊은 간으로 술을 마시고 게워 내고, 그리고 또 마시며. 성민은 그렇게 그녀를 지워냈다.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여섯. 소주 여섯 병. 술을 그렇게 마셔댔으니 당연히 집에 잘 돌아갔을 리 없다. 아니나 다를까, 성민은 순환 지하철에 갇혀 몇 시간 만에 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마저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의 여동생과의 통화로 알게 되었다. 그의 여동생은 날카롭게 나에게 물었다. “오빠한테 무슨 일 있어요? 꼴이 말이 아닌데. 어디서 맞았어요?” 앙칼진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말을 얼버무리며, 엉성한 변명만을 늘어놓곤 전화를 끊었다. 아무리 걱정하더라도 그가 첫사랑 때문에 울고불고했다는 것을 동생에게 알릴 수는 없지 않은가. 


성민과 나는 대학교 동기로 언제인지 기억도 못 하는 사이에 친해져 있었다. 그와 나는 함께 꿈을 키워나가는 좋은 친구였다. 성민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혜롭고, 차분했다. 이런 성민은 내가 좌절할 때, 지혜가 필요할 때 늘 제일 먼저 찾는 친구였다. 그런 그가 제대로 고꾸라졌다. 같은 학과 동기이자 연인이었던 혜연과의 이별 때문에.


군대에서 돌아와 복학한 성민은 학교에 남아있던 나와 혜연과 함께 셋이 수업을 듣곤 했는데, 그때 그는 오랜 친구로 지냈던 혜연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의 싱그러운 미소 때문이라던가. 이후 성민은 몇 번이나 혜연에게 고백했지만 그녀는 그의 마음을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할 줄 모르는 성민의 노력에 결국 그녀는 성민의 마음을 받아들였고, 둘은 연인이 되었다. 풋풋한 대학생 커플. 혜연의 마음을 얻어낸 성민은 말 그대로 그녀밖에 모르는 바보가 되었다. 자신이 살아온 25년의 세월 동안 혜연만큼 사랑하는 존재는 없었다는 등의 요란한 말들을 늘어놓거나 하염없이 실실 대며. 나도 처음 보는 내 친구의 모습이었다. 그만큼 성민은 정말 자신의 온 마음을 바쳐 그녀를 사랑했다. 


혜연은 우리 동기들 중에서도 똑똑하고 야무진 깍쟁이 같은 친구였다. 나는 혜연과도 친하게 지냈지만, 성민과 그녀가 사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상주의자 성민과 현실주의자 혜연. 정반대인 둘의 만남은 내게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그들은 그 나이의 학생답게 순수한 첫사랑을 나눴다. 수업 시간 옆자리에 앉아 소곤거리거나 점심시간에는 김밥 한 줄을 나눠 먹기도, 시험공부를 위해 도서관에서 같이 밤을 새우기도 하며. 가진 게 뻔한 학생 신분이었음에도 성민이는 혜연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자 했다. 만일 성민이가 재벌이었다면 우주선을 쏴서라도 혜연에게 하늘의 달도 별도 따서 바쳤으리라.


그렇게 얼빠진 사람처럼 마음을 쏟아내던 그가 그녀와 멀어진 것은 그로부터 딱 1년 뒤다. 혜연은 성민보다 먼저 졸업하여 직장인이 되었고, 복학생 신분이었던 성민은 아직 학교에 남아있었다. 혜연은 직장에 적응하느라, 성민은 학업과 혜연과의 관계를 병행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학생과 직장인 커플. 한 사람이 학교 밖을 벗어나고, 서로의 입장이 달라지자 그들은 부딪치기 시작했다. 성민은 늦게까지 술자리에 있는 혜연을 걱정하고 불안해했으며, 혜연은 신입사원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자신을 채근하는 성민이 답답하고 힘들었다. 그 무렵 성민 또한 취직을 위해 준비할 게 많아 급급했고, 사회에 나온 혜연은 어느새 그런 남자 친구와 이미 반듯하게 자리 잡은 직장 선배들을 비교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성민은 막연하게 그녀와 미래를 함께할 것이라 꿈꿨지만, 직장인이 된 혜연은 결혼이란 것을 하려면 얼마가 필요한지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균열이 생기자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자세한 과정은 모르겠으나 성민의 말로는 그녀가 같은 직장의 선배와 바람이 났다고 했고, 혜연의 말로는 집착이 심해지는 성민이 힘들어 헤어졌다고 했다.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둘은 완벽히 서로를 비난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각자에게 맞는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혜연과의 이별 후 휘청대던 성민은 어느 날, 두 시간 거리에 사는 나를 찾아왔다. 작은 술집에 앉아 성민은 고해성사하듯 내게 모든 것을 다 떨쳐냈다고, 후련하다고 이야기했다. 거짓말.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안다. 성민은 혜연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 텅 빈 마음이 채워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소주가 한 병, 두 병 늘어가자 그의 감정은 널뛰었다. 괜찮다고 했다가, 욕을 했다가. 혜연을 비난했다가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가. 평소 같았으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냐며 놀렸겠지만, 그날은 성민이 모든 것을 털어낼 수 있도록 그저 들어주었다. 미친 듯이 술만 들이켜던 그는 결국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여동생의 말로는 집에 도착했을 때도 울고 있었다고 하니 아마 성민은 그날 몇 시간을 울었나 보다. 성민은 그렇게 힘들게, 아주 어렵게 첫사랑을 떠나보냈다.


스물다섯의 여름. 그때의 우리는 사랑도 젊음의 패기로 아주 열정적이게 할 때였다. 첫사랑과의 이별에 눈물 콧물 흘리던 성민의 과거는 나에게 평생의 놀림거리가 되었지만, 사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성민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오롯이 제 몫을 다 아프고 나서, 참지 않고 울고 싶은 만큼 다 울고 난 후에 그녀를 훌훌 털어냈기 때문이다. 성민은 혜연과의 이별 후 굉장히 성숙해졌다. 학교생활에 집중하며 좋은 성적을 받고 졸업했고, 이후 큰 회사에 취업해서 다니다가 얼마 뒤엔 결혼까지. 아주 차근차근 때에 맞게 잘 성장했다. 친구로서 뿌듯할 만큼.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성민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낳고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다. 오래전 술집에서 아이처럼 울었던 그때의 일은 아직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회자되지만, 이제는 오래된 추억이라며 성민은 껄껄 웃는다. 


나는 이런 성민을 보며 생각한다.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감정을 추스르는 것만이 정답은 아닐 거라고. 성급하게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이렇듯 덮어버리는 것은 머지않아 더 큰 시련을 초래할 것이 틀림없다고 말이다. 그러니 때로는 몇 시간 또는 며칠, 아니 몇 년이 걸리든 용기 내서 슬픈 만큼 슬퍼할 줄도 알아야 한다. 본디 빠르게, 아프지 않게 지나가는 시련이란 없지 않은가. 


그렇게 충분히 아파한 후 마침내 눈물도 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비워졌다면, 그때 그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다시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 내가 존경하는 나의 친구, 성민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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