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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Apr 02. 2024

신호등이 꺼지자  민정은 이별을 결심했다.

재회한 연인들은 웃고 울 때에도 눈치를 본다.

민정은 몰아치는 폭우를 뚫고 운전을 하던 중이었다.

와이퍼를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습게도 그 순간 민정은 이 상황이 자신과 석진이 처한 상황 같다고 생각했다.

함께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웃음을 잃은 지 아주 오래된 연인.


민정은 요즘 석진에게 많이 지쳐있었다. 석진 또한 민정을 지겨워하고 있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이미 다 낡아빠졌는데 누구도 이별을 고하지 못하는 두 사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빨간 불에 멈춰 선 사거리. 매서운 바람에 높이 걸려있던 신호등이 휘청였다.

그리고 갑자기 빨간 불마저 꺼지더니 어떤 불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순간 민정은 울음을 터뜨렸다.

‘이 혼잡 속에서 나를 구원해 줄 신호등마저 꺼져버리다니.’ 민정은 아주 애석하다는 듯이 온 마음을 다해 신호등 탓을 하며 마치 신호등이 죽기라도 한 것처럼 차 안에서 눈물을 흘렸다.


잠시 후 거리에 사람들은 빗속에 하나둘 창문을 열기 시작했다. 손짓을 하고 큰 소리로 사인을 주고받으며 좌회전과 직진, 우회전을 번갈아 가며 길을 열었다.

그리고 자신의 순서에 맞춰 혼잡스러운 길을 떠났다.

어느새 어지러웠던 도로는 정리가 되었고 민정의 감정 또한 추슬러졌다. 그때 꺼졌던 파란 불이 들어왔다. 다시 들어온 신호에 맞춰 움직이며 민정은 차를 돌려 석진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늘은 꼭 이별을 고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렵게 재회한 만큼 민정은 석진과 다시 이별하게 될까 봐 그동안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전처럼 집에 얼른 들어가라고, 술은 적당히 마시라고. 기념일에는 함께 있고 싶다고 조르지도 않았다.

장난 섞인 석진의 양해에 말없이 웃어 보일 뿐.

그저 기다리고 기다렸다. 석진은 민정에게 변한 모습을 보여주겠노라 자신 있게 말했지만, 민정은 두 사람이 재회한 지 며칠 만에 다시 외로워졌다. 그리고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탓하기 시작했다. 민정이 점점 말이 없어질수록 석진은 자연스레 다시 자신의 삶에 젖어갔다. 그리고 어쩌다 한번 민정이 싫은 이야기를 하기라도 하면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민정도 이 관계를 놓아버렸다.


민정은 오늘 아마 그 어떤 때보다 조심스럽게 석진의 눈치를 볼 것이다. 석진은 이별을 어떻게 그렇게 또 쉽게 뱉냐고,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다고 말을 하지 그랬냐며 민정을 답답해할 것이다. 하지만 민정은 오늘만큼은 석진이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거리에서 본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온갖 손짓을 하고 사인을 주며 그를 과감히 떠나보낼 것이라 결심하며 핸들을 더욱 꽉 잡았다.


민정은 이제 서로의 낡은 마음은 비가 오는 거리에 내려놓고, 파란 불에 맞춰 각자의 길을 가자고 말할 것이다. 자신은 좌회전을 할 테니 당신은 우회전을 해서 최대한 나와 멀리 떨어져 떠나 줬으면 좋겠다고.

석진이 캄캄한 도로에 남아있는 민정의 티끌 같은 미련도 보지 못하게 말이다.


민정의 파란 신호가 켜졌다.

민정은 이제 그를 떠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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