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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Apr 09. 2024

결혼을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프러포즈를 받던 날, 나는 도망쳤다.

영원히 함께하자며 수줍게 내민 그의 마음에

나는 겁을 잔뜩 주워 먹고 250km를 내달려

강원도 한 시골에 숨어 들어갔다.


나는 비혼주의자다.

사랑을 나눌지언정 그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 믿은 적도 없었거니와 미래를 그렸을 때 내 곁에 ‘남편’이란 존재는 없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어쩌다가 내가 프러포즈를 받게 된 것일까? 기대에 차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더듬거리며 겨우 둘러대는 말을 뱉고는 그 길로 나는 도망쳤다.


당시 나는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상태였다. 한창 일에 집중하던 때라 며칠 밤을 밤새우는 것도 다반사, 프로젝트를 하나 끝내면 여기저기 아파 병원에 드러눕기 일쑤였다. 남들처럼 밥때 밥을 먹고 잘 때 잠을 자는 그 ‘기본적인 생활’마저 안 됐다. 어떤 한 프로그램을 할 때에는 일 년에 반 이상을 섬에서 전복을 따며 보냈다. 또 어떤 때에는 전국 방방곡곡 오지만 찾아 돌아다니며 지역 특산물을 팔기도, 위대한 한국의 비빔밥을 알리기 위해 말도 안 통하는 해외에서 식당 운영 준비를 하기도 했다.


이런 생활을 10년도 넘게 하다 보니 애인과의 기념일, 생일, 친구들의 경조사는커녕 내 인생을 챙기기도 버거웠다. 휴대폰이 있어도 사람들과 잘 닿지 않는 곳에 있다 보니 나는 모든 이에게서 멀어졌고 그마저도 나에겐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주위에서 종종 ‘뭘 한다고 그리 바쁘냐,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일하는데.’라고 핀잔을 주면 나는 입을 꾹 닫는다. 작가가 새벽 양식장에서 전복을 따느라, 해외에서 비빔밥 재료를 200인분 준비하느라 바쁘다고 말해본들 누가 이해하랴. ‘왜 그렇게 사냐’라는 말 안 들으면 다행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결혼은커녕 내 인생에 ‘남편’이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조차 없다. 하물며 나 자신도 일과 조금만 떨어지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천치인데 이런 내가 결혼생활을 잘 해낼 리 없다. 단언컨대 단 한 번도 결혼한 내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강원도 산골짜기에 숨어 삼일, 사일, 그리고 일주일을 꼬박 보냈다. 나는 휴대폰도 제대로 보지 않고 그저 어떻게든 이 일이 해결되기만을 바랐다.

누구보다 당황스러웠을 그에게 일주일이 꼬박 지나서야 나의 은신처를 알렸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는 케케묵은 변명을 해댔지만 속으로는 어떻게 이 상황을 피할 수 있을지 머리를 잔뜩 굴려 시뮬레이션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딱 3시간 뒤, 그 무서운 반지를 다시 들고 그가 찾아왔다. 쉬지도 않고 그 먼 길을 달려왔단다. 그리고 그는 신발도 벗지 않고 문턱에서 내가 끼어들 틈도 없이 입을 뗐다.


나를 만나기 전, 그도 나처럼 불규칙한 하루하루를 미션 깨듯이 살았다고 한다. 카메라 감독인 그는 제주도 물속에 뛰어들어 물고기를 찍다가 산소통이 작동을 안 해 병원에 실려 가기도 하고, 아이돌을 찍기 위해 오른 무대 사다리에서 떨어지기도, 뙤약볕에 40km 마라톤을 뛰기도 했다. 그는 이런 시간에 지쳐 안정에 대한 갈망이 커졌을 무렵, 나를 만났다고 했다.


동료였다가 연인이 된 우리는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았다. 매일 밤 하루의 마지막 일과처럼 누가 누가 더 힘들었는지 서로 힘든 척을 하기도 하고, 이해되지 않는 짓을 한 사람이 있다면 밤새 같이 욕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내 편이 있어서. 나에게서 안정을 느꼈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그는 나에게 늘 말을 했다.

갑자기 방언이라도 터진 듯이 항상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나는 좀 피곤한 날이면 그를 무시하기도 했는데 그런 날은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내 뒤통수에, 자는 내 귀에 대고 이야기를 해댔다. 그는 나와 이야기하는 게 너무 재밌다고 했다. 동료에서 연인으로 처음 만나던 날, 우린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정말 6시간을 떠들었었다. 나도 그의 곁에선 입을 꾹 닫는 대신 아주 소소한 것부터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그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이 오롯이 쉬는 때였다고 했다.


이제는 서로의 휴식과 위안을 넘어 가족이 되자는 그에게 나는 정신을 바로잡고 칼을 빼내는 마음으로 거절의 말을 꺼냈다. 오늘, 내일, 모레 일도 확실하지 않은 삶을 사는 우리가 당장 친구와 약속도 못 잡는 판국에 누구와 평생을 약속할 수 있겠냐며 날카로운 말로 그를 찔렀다.


긴긴밤을 지새우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이렇다 할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한 채로 아침이 밝았다. 퉁퉁 부은 눈을 한 채 우린 함께 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나에게 주었던 반지는 집 한쪽에 있는 찬장에 보관했다. 그 후 우리는 그 찬장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는 척 연기 아닌 연기를 했다.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이야기를 하던 그도 내가 찬장 앞을 지나칠 때면 괜히 자릴 피하곤 했다.


집에 혼자 있던 어느 날, 나는 몰래 반지를 꺼내보았다.

숨겨두었던 반지처럼 깊이 숨겨둔 이유를 찾고 싶다.

왜 나는 그와 결혼할 수 없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일과 나를 분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일에만 집중하는 동안 나에게 상처받고 떠난 사람들이 떠올랐다. 가장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해외에 있었다. 섬에 있을 때는 휴대폰이 터지지 않아 의도치 않게 잠수이별을 하기도 했고, 부모님 생신에도 찾아뵙지 못하기 일쑤였다.

나는 내가 일을 하는 동안 누군가에게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간을, 불안에 떨며 염려하는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혼자가 낫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내가 아무리 멀리 간들 나를 그 끝에서 기다려주는 그가 있었다.

바보처럼 나는 내 하루의 끝에는 그가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아차리는데, 일 년이나 더 걸리고 말았다.


나는 그간 말벌을 잡으러 산에 다녀오기도 하고

무인도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고된 여정 끝에는 늘 집에서 반겨주는 그가 있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내 이야기를 들으려 눈을 치켜뜨고

멍투성이가 된 내 발을 어루만져주는 그가 있다.

매콤하고 달콤한 MSG 가득 담긴 그가 얼렁뚱땅 만든 김치찌개를 나눠 먹은 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정말 내 집에 온 것 같다.’


그렇게 내 인생 가장 추웠던 겨울을 보낸 후

가장 볕이 좋은 4월의 어느 날.



나는 그 누구보다 밝게 웃으며 신부 입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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