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렇게 무료한 하루가 또 흘러갔다

불편한 블루스

by rosa

2.



남편 상(喪)을 치르고 자식들 결정을 존중하여 연이는 막내아들 집에 살기로 했다. 맘 같아서는 혼자 산에 살면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싶었지만 남편이 없는 외딴 산속은 겁 많은 연이가 지낼 만한 곳이 아니었다.


장가 안 간다던 막내아들이 이년 전 중국인 아가씨를 데려와서 결혼하겠다고 했다. 가정을 이룬다는 그 말 한마디가 고마웠다. 온 가족의 축복 속에 선재가 결혼했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게 예쁜 손녀도 생겼다. 모든 것이 고마웠다. 수완 좋은 선재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이 대견했다. 연이를 위해 사소한 것까지 신경 써주는 아들, 며느리 그리고 손녀와 지내는 하루하루가 평온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연이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외국인 며느리와의 관계에서 불편 함을 느꼈다. 눈치로 대충 이해하며 손짓 발짓 섞은 대화가 피곤했다. 아들이 퇴근해서 둘 사이에 오간 대화를 듣고는 어이없어했다. 완전히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다고….

천성이 밝았던 연이지만 그런 시간은 조금씩 불편함을 넘어서는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아이를 둘러업을 만한 건강 상태도 못 되는 지라 손녀와 맘껏 놀아 줄 수 없는 처지가 스스로 딱하게 느껴졌다. 노인이 되면 보이는 모든 것이 슬프다고 하더니 연이의 일상에도 고독이 어둠처럼 깔리고 있었다.



“ 엄마, 다쳐. 아기, 다쳐 ”


며느리가 안색이 파래지며 포대기 둘러서 손녀 한번 업어 보려고 준비하는 연이를 뜯어말렸다. 딸을 끔찍이 여기는 며느리가 예쁘다 생각하다가도 ‘아직은 내가 생각이 멀쩡한데 제 딸 다치게 할까 봐 만지지도 못하게 하네.’라는 생각이 들면서 늙었다고 무시하는 것 같아 심술이 나기도 했다.

연이는 갇혀 지내는 하루하루가 점차 지루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살아내야 하는 날들에 대한 불안이 엄습했다.

퇴근해서 돌아온 막내아들은 언제나 다정하게 같은 말을 했다.


“ 엄마, 별일 없으셨어요?”

“ 그래, 아비도 잘 다녀왔지?”

“ 네, 엄마 쉬세요.”


세 식구가 방에 들어가서 하하 호호 웃으며 화목한 시간에 연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TV 리모컨을 이리저리 소리 나지 않게 돌려 보는 것이 전부였다. 이 지루한 시간을 어찌 버텨야 하나 고민에 빠지면서 이렇게 우울증 환자가 되는 건가 하는 불안에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냈다.


“ 딸 자니?”


간호사로 근무하는 딸은 야간 근무를 자주 하는 터라 낮 시간에 자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전화를 거는 것도 어렵다. 어쩌다가 한 번씩 들려주는 목소리에는 피곤이 묻어 있어서 정말로 조심조심 눈치 보며 전화를 걸곤 한다.


“ 네 ”


잠결인지 그 한마디만 하고는 뚝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야속함이 밀려들었다. 연이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서 좀 살 갑 게 굴어 주면 좋을 텐데, 딸도 대하기 어려운 건 매한가지이다. 하기사 딸은 집이 싫어서 일찌감치 시집을 갔는데 겨우 오 년 살고 이혼했다.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며 힘들게 살고 있어서 연이에게는 아픈 손가락이다. 외손주 둘 다 모두 바르고 성실하게 잘 커서 제 엄마를 위하니 불행 중 다행이라 여길 뿐.

연이는 또다시 리모컨을 잡고 1번에서부터 하나하나 채널을 올리기 시작했다.


“ 엄마, 잘 지내시죠?”


역시 다정하기는 둘째가 최고다. 외로운 연이의 맘을 아는 듯 살 갑 게 전화라도 해주는 선수가 연이는 제일로 편하다.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하는 일마다 여의치 않아서 요즘은 작은 회사에 취직해서 일하고 있다. 지난주에는 어깨가 아프다고 해서 내심 걱정했는데 오늘은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해주어서 왈칵 눈물이 날 듯 기뻤다.


“ 엄마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자상한 선수는 연이의 미묘한 감정 변화도 쉽게 알아채는 능력이 있어서 가끔은 숨기려 애써도, 슬픈 감정을 들키기도 했다.


“ 아니야 아들, 엄마는 잘 지내고 있지, 아들 어깨는 괜찮아?”

“ 괜찮아요. 괜히 말해서 엄마 걱정시켰어요.”

“ 주말에 가서 맛있는 거 만들어 드릴게요.”

“ 고마워, 아들.”


연이는 둘째 아들과의 전화통화로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그렇게 무료한 하루가 또 흘러갔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03화가을이 막 시작되던 어느 저녁 무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