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삶을 다한 나뭇잎 하나가 발등에 툭 떨어졌다

불편한 블루스

by rosa

3.




아직은 햇살 좋은 가을인데 연이는 안으로 스미는 바람에 한기를 느낀다. 스카프 한 장으로 목을 감싸니 그나마 온기가 느껴졌다. 산책하라고 딸이 성화를 부려서 아픈 허리를 끌고 아파트에 딸린 공원에 나왔다. 가을 물든 은행잎이 지팡이에 딸려왔다. 운동을 안 하니 근육 량이 적어져서 허리가 더 아픈 거라는데, 저 같으면 이렇게 아픈 허리와 무릎으로 얼마나 운동을 할지 서운 한 생각이 언뜻언뜻 들어왔다.


“ 에고 네가 나만큼 아프면 안 되지, 아서라 나 혼자 아프다 죽으련다.”

혼잣말을 소리 내서 뱉으며 연이는 벤치에 무거운 몸을 올려놓았다. 가을에는 딸을 낳고 몸조리를 못한 탓인지 온몸이 말도 못 하게 아프다.

연이의 고명딸 선영. 자신조차 어렸던 스물한 살에 낳은 딸을 떠올리며 연이는 옷 속을 파고드는 바람처럼 시린 설움을 느꼈다. 연이 눈가가 붉어졌다.


“ 이년아, 아들을 낳았어야지 그깟 계집애를 나아 놓고 미역국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남편은 지난밤에도 연이에게 주먹다짐과 함께 가죽 허리띠를 풀러 휘둘렀다. 주인집에 싸우는 소리가 들릴까 봐서 '악' 소리도 내지 못했다. 남편은 술에 취하는 밤마다 폭력을 휘둘렀다. 연이는 몸 푼 지 일주일도 안 되는 몸으로 모진 매를 참아 내고 있었다. 딸이건 아들이건 그 결정이 남자에게 있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무서운 남편 앞에서 연이는 입 한번 달짝 일 수가 없었다. 그저 술 취한 남편이 어서 잠들기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소리 죽여 울었다. 어린 엄마였지만 행여나 갓 난 딸이 놀라지 않을까도 걱정이 됐다.


“ 어서 화 풀고 주무세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연이는 주문처럼 이 말만 돼 뇌이며 빌고 또 빌었다. 고단한 밤은 그렇게 느린 걸음으로 지나갔다.


어스름 새벽, 연이는 마을 끝 저수지에 섰다. 더 이상 이렇게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지은 죄 없이 빌고 있는 초라한 자신도 싫었고 이유 없이 매 맞는 자신은 더더욱 비참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저 눈 한번 질끈 감고 물속으로 뛰어들면 모든 슬픔을 끊어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차라리 편안함을 느꼈다.


“ 아버지 죄송해요, 저 더 견디기 싫어요, 용서하세요.”

언제나 연이에게 자애로운 아버지가 생각나 잠시 주춤했지만 아버지는 이해해 주실 것 같았다. 딸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아버지도 원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내딛는 발에 힘이 실렸다.

차가운 물에 왼쪽 발을 담갔다.

‘찌릿’ 젖이 돌며 앞가슴을 흥건하게 적셨다. 배고파 울고 있을 아직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딸아이 얼굴이 아른거렸다.


“ 아가. 내가 없으면 그 작고 여린 것이 어떻게 살아갈까?”


정신이 번쩍 난 연이는 물속에 담갔던 발을 빼서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딸을 부르는 뜨거운 눈물이 휘청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미동없이 앉아있던 백발 연이는 오십팔 년 전 그날처럼 흐르는 눈물을 소리 없이 닦아내고 있었다.

삶을 다한 나뭇잎 하나가 발등에 툭 떨어졌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04화그렇게 무료한 하루가 또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