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피었다
불편한 블루스
5.
오전에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모처럼 딸과 한가로이 지낼 생각에 연이는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한겨울이 아닌데도 며칠간 한파가 기승을 부렸다. 오늘은 백화점에 간다니 굳이 두꺼운 옷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연이는 가벼운 블라우스 위에 포근한 카디건을 챙겨 입었다. 딸은 시트까지 데워서 따뜻해진 자가용을 몰고 연이를 데리러 왔다. 운전이라면 연이도 소싯적에 누구에게 빠지지 않을 만큼 잘했는데 칠 년 전에 운전면허를 자진해서 반납했다.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으나 그렇게 인정할 건 인정하자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딸과 생선 정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늘 밥상에 올라오는 고기대신 고소한 생선구이가 식욕을 자극했는지 이인분 모둠 생선을 깨끗이 비웠다. 기분 좋은 포만감에 여유로워진 모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다 문구점에 들렀다. 사십 년쯤 전에 연이는 문구와 완구를 겸한 작은 점포를 운영했었다. 알록달록한 돼지 저금통을 진열하면서 아이처럼 즐거웠던 기억이 있어서 문구점 아이쇼핑은 언제나 즐거운 시간이다. 딸도 그때 이야기를 하면 돼지 저금통과 딱지, 구슬을 기억해 내곤 했다. 요즘 문구점은 예전 물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품질이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비닐포장에 먼지가 가득히 내려앉으면 먼지 떨이개로 털어내곤 했었는데. 연이 눈에 깔끔한 진열대에 전시된 제품들이 제법 고급스럽게 보였다.
선영의 나이도 환갑이 코앞인데 아직도 문구점이 좋다고 했다. 딸은 펜 종류를 특히 좋아했다. 그립감과 필기 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딸은 필기구 코너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곤 했다. 그날도 선영은 펜 쪽에 잡혀있었다. 연이는 혼자 구경하다가 화구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에서 발길을 멈췄다. 빨강 꽃들이 예쁘게 그려져 있는 캔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저런 그림은 타고난 실력이 있어야 그리는 거겠지?" 버릇처럼 혼잣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 엄마 꽃 그림 그려 보실래요?” 어느 틈에 딸이 연이의 혼잣말을 들었나 보다.
“ 예쁘긴 한데 엄마가 저런 그림을 어찌 그리누.” 연이가 지레 겁먹고 손사래를 쳤다.
“ 엄마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딸은 항상 그렇게 말했다. 스마트폰을 처음 사용한 것도 딸의 권유와 격려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보며 신기했고 재미있어 보였다. 그러나 연이는 새로운 문물을 접할 때 항상 두려움이 앞섰다. ‘ 난 못 할 거야.’ 그건 연이의 겸손이었다. 막상 어떤 것이든지 접 한 이후에는 누구보다 잘 사용했고 그런 시작은 언제나 딸로부터였던 것을 연이는 항상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 엄마 저 그림은 밑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림에 번호가 매겨져 있어요. 그냥 번호가 적혀 있는 대로 물감을 발라주면 그림이 완성되는 거예요.”
“ 많이 복잡해 보이는데 그렇게 완성이 된다고?”
딸은 처음 연이의 눈을 끌었던 빨간색 꽃그림과 강아지 두 마리가 그려져 있는 캔버스를 구매했다. 집에 오자마자 그림 도구들을 연이 눈앞에 펼쳐 놓고 시범을 보였다. 연이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붓에 물감을 적시고는 아주 작은 부분부터 물감을 칠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섬세하게 매겨져 있는 번호들을 따라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가끔 엉뚱한 색깔을 들고 캔버스 위를 헤매기도 했으나 칠을 해나갈수록 묘한 매력을 느꼈다. 아무 생각 없이 물감 칠을 하다가 멀찍이 그림을 놓고 쳐다보면 제법 형태가 잡혀가고 있었다. 신기한 물건이라 생각하며 연이는 그림에 푹 빠져 들었다.
‘그림 하나 가지면 한 달은 재미있게 그리실 수 있을 거예요.’라고 딸이 말했었는데 어느새 그림이 완성되었다. 밤을 꼬박 새워 그림에 몰두했던 연이는 그림이 완성되고 나서야 밤을 새웠다는 것을 알아챘다. 연이는 그림을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딸에게 전송했다. 바로 전화가 울렸다.
“ 엄마, 벌써 그림 완성하신 거 에요?”
“ 그러게 어쩌다 보니 완성이 됐네.”
“ 아이고 엄마, 허리 안 아파요? 나도 전에 그거 비슷한 거 가지고 한 달 동안 그렸는데 뭔 일이래요.”
걱정인지 감탄인지 평소 딸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다. 연이는 스스로 만족할 만큼 그려진 그림 앞에서 느끼는 피로감이 나쁘지 않았다. 무료하게 며느리 기분 살피며 지내는 시간보다 훨씬 보람도 있었고 완성했다는 성취감이 있어서 좋았다. 물론 밀려오는 허리 통증은 어쩔 수 없이 연이가 감당해야 할 무게였지만.
연이는 이어서 강아지 그림에 도전했고 또 하루 밤 만에 두 마리 강아지그림을 완성했다. 밑그림이 좋아서겠지만 살아있어 보이는 강아지 그림에 더 정감이 느껴졌다.
백화점 다녀온 지 사흘째 날에 얼굴 보기 힘든 선영이 왔다. 엄마를 보러 온 건지 그림을 보러 온 건지 연이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딸의 얼굴을 보는 것은 연이에게는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림을 보던 선영이 한참만에 그림이 미완성이라고 했다.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불안해하던 연이의 표정을 읽었다는 듯 선영이 웃으며 말했다.
“ 엄마, 화가 사인이 빠졌어요.”
딸이 연이를 ‘화가’라고 칭했다. 펜으로 ‘Sha’라고 써주면서 캔버스 우측 하단에 그려 넣으라고 했다. 연이가 떨리는 가슴을 다독이며 날자와 사인을 그려 넣었다. 그렇게 연이의 첫 작품이 완성됐다.
“ 엄마는 화가 했어도 잘하셨을 거 같아요.”
오랜만에 연이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