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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지만 입니다

불편한 블루스

by rosa

7.



연이가 약속 시간보다 십오 분이나 일찍 일층 현관 앞에 지팡이를 짚고 섰다.

약속시간에 늦는 법이 없는 그녀답다. 오늘은 설레서인지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정갈하게 샤워 하고 꽃단장을 시작했다.

남편은 연이 얼굴에 난 마마자국을 싫어했다. 그 때문인지 결혼생활동안 연이는 맨 얼굴인 적이 없었다. 항상 단정한 화장으로 아침을 준비하면서 잠들 때까지 화장을 유지하도록 애썼다. 비싼 화장품을 쓰지 않았지만 소박한 연이 화장대에는 최소한의 화장품이 정돈되어 있었다.

연이 화장 하이라이트는 핑크 립스틱이다. 언제부터 핑크색을 썼는지 기억 나지 않지만 밝고 흰 연이의 피부에 진달래 빛 립스틱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오늘 입으라고 딸이 사준 연한 핑크색 스웨터위에 은사로 목련이 수놓아진 멋스런 스카프를 둘렀다. 회색 모직외투와 연이의 꽃단장이 조화되어 제법 고급진 느낌을 주었다. 바람이 살랑 불었지만 춥지 않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약속된 시간에 ‘찐사랑주간보호센터’라고 적힌 승합차량이 연이의 앞에 멈추어 섰다. 얼굴을 익혀 둔 선생님이 웃으며 인사 했다.


“ 연이 어르신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어르신을 모시게 된 박 선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연이 어르신 저는 강기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연이라는 이름을 불러주는 두 선생님에게 친근함이 느껴졌다. 연이 도 허리숙여 깊은 절로 인사 했다.

" 잘 부탁드립니다. "


인사를 하는 동안 연이 얼굴은 발그레 상기되었고 가슴은 콩닥 대고 있었다.

육 남매에 맏이인 연이, 국민학교 졸업이 가방끈의 전부였다. 없이 사는 집도 아니었는데 그때는 왜 딸이 공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는지 연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교복 입고 등교하는 친구들이 부러워서 남몰래 숨어 눈물 짓던 일은 연이에게 평생 아물지 않는 상처였다. 남편 학대를 받을 때는 그 설움이 더욱 커졌다. ‘내가 공부를 많이 했더라면 저런 사람 만나 이런 대접 받을 일이 없었을 텐데.’라는 생각에 부모님을 원망했던 적도 많았다.

딸이 중학교 진학을 앞두었던 때, 연이는 자신이 입학 하는 것처럼 기뻐하며 ‘ 딸과 함께 영어공부도 해야지.’ 라는 바람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일 뿐 소망은 이루지 못했다.


처음이라는 단어는 나이와는 관계없이 설레는 일이었다. 직원 안내를 받아 소지품 담은 가방에서 미리 준비한 실내화를 꺼내 갈아 신었다. '사 연이' 예쁜 이름표가 꽂인 사물함에 가방과 외투를 넣고 널찍한 실내에 들어섰다.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퍼져있는 거실, 편해보이는 소파가 줄지어 있는 공간에 연이보다는 연배 있어 보이는 어른원생들이 보였다. 박 선생의 안내로 새로운 친구들을 소개받았다.

“ 백 지만입니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 처음 뵙겠습니다, 사 연이입니다.”

연이는 이후에 소개받은 새 친구들 이름이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 ‘백 지만’이라는 이름만 귓가에 맴맴 돌고 있었다.


첫날에 연이는 쉽게 새 친구들과 섞이지 못했다. 원체 나서지 않는 성격인데다 새로운 환경이 낯설었다. 선생님들이 연이를 새 친구에게 소개했지만 인사나눈 뒤 친구들은 연이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고 연이도 그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친구라 하기 에는 스무 살 이상 차이 나는 것처럼 보였고 노인들 상태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관찰 해보니 치매로 보이는 노인들이 많았다.


“ 휴, 쉽지 않겠어.”

연이는 낮은 한숨을 토했다.

오후 네 시 하원 차량에 오르기까지 연이는 낯선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정쩡 불편한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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