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 연이 씨?”
누군지 모르겠다. 어제 인사를 했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난 아직 치매는 아닌데.’ 연이의 머릿속이 하얗다.
“ 반가워요, 연이 씨 호식이라합니다.”
“ 네 반갑습니다.”
“ 제가 어제 결석했거든요. 그래도 연이 씨 새로 오신 건 벌~~써 다 알고 있답니다.”
어떻게, 뭘 알고 있다는 건지 몰라도 아무튼 반갑다니 한시름 놓였다. 호식이 있어서 인지 어제와는 확실히 다른 센터 분위기가 느껴졌다. 살다 보면 저렇게 밝은 사람이 꼭 끼어있다. 연이는 평생 재미없는 사람과 살아서 그런지 호식 같은 유쾌함이 좋았다.
등원하자마자 첫 프로그램은 혈압과 맥박, 체온을 측정하는 일이다. 연이는 기립 성 저혈압으로 인해 여러 번 실신 하여 매일 혈압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입소서류에 적힌 보호자의 특별 주의사항 첫번째가 실신 위험이었던 것을 혈압을 체크하던 간호선생님이 꼼꼼히 확인하고 있었다.
노인 학생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들어와서는 혈압을 재고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아침풍경이 정겹게 느껴졌다.
“ 새로 오셨지요? 어제는 바빠서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어요.”
“ 네 잘 부탁드려요.”
위생복을 깨끗이 갖춰 입은 조리장이 아침 간식을 나눠 주면서 연이에게 다정히 인사했다. 눈웃음이 매력적인 여인이다. 그러고 보니 센터에는 많은 직원이 근무 하는 듯했다. 운전을 해주던 기사님도 어제 올 때 갈 때 그리고 오늘 아침까지 모두 다른 얼굴이었다. 이 많은 직원들 월급 주는 것도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쓸데없이. 연이는 전날보다는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편안함을 느꼈다.
연이는 그다지 간식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쿠키가 담긴 접시에는 손 대지 않았고 요구르트 한 병에 빨대를 꽂아 마셨다. 옆에 앉은 효심이 양해도 구하지 않고 홀랑 연이의 간식을 집어가 제 입에 털어 넣었다.
‘ 효심은 내 스타일이 아니군.’ 연이는 기피대상 1호로 효심을 낙점했다. 어느새 호식이 연이의 옆자리에 와 앉았다.
“ 연이 씨라 불러도 괜찮을까요? 내가 두 살 어리거든요. 설마 두 살 차이로 누나라고 부르길 바라는 건 아니죠?”
“ 아.”
두 살 어리다는 말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얼굴은 까맣고 눈에는 노란 기운이 보였다. 배는 불룩한데 어깨는 말랐다. 듬성듬성한 머리카락은 호호 백발이다. 누가 봐도 열 살 이상 많아 보이는데.
‘ 농담인가? 어떡하지?’
‘ 그런데다가 친구 하자는 건가? 연이 씨라. 흠.’
말문이 막힌 연이는 어색한 웃음지으며 그 자리를 모면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휘청, 눈앞이 번쩍 했고 연이는 바닥에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놀란 원장을 비롯한 교사와 원생들이 연이의 주변으로 단숨에 몰려들었다. 비명을 지르는 효심도, 바로 옆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원흉이 된 호식도 그리고 아까부터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지만도 놀란 강도(强度)는 같았다.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야 했는데 호식에게서 벗어나려 급하게 일어난 것이 원인이었다. 딱 3초 만에 연이는 최고 화제 인물이 되었다.
여러 번 경험을 통해 연이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다른 사람이 많이 놀랐다는 것도 곧 딸에게 연락이 갈 거라는 것도 다 알고 있으면서 여전히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아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유는 많았지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창피하다’였다. 혼자서 일어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고 쓰러지면서 골절되지 않았다면 가벼운 부축으로 일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의 몸은 너무 무겁다. 두세 명이 달려들어 일으키려고 할 텐데 첫인상으로 남기기에는 영 예쁜 그림이 아니다.
예상 한 대로 원장님이 선영에게 먼저 연락을 했고 이런 상황을 잘 아는 딸은 놀란 원장님을 달래며 상황을 수습했다. 119 구급대원들이 도착해서 외상 여부를 파악하는 중간에 선영도 도착했고 연이는 딸이 근무하는 병원에 입원 했다.
“ 괜찮지 엄마?”
“ 괜찮지 모. 다른 사람들이 많이 놀랐겠다.”
“ 혹시나 몰라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진 다 찍었는데 특별한 건 안 보인대요.”
“ 그럼 퇴원하자.”
“ 그래도 하루 지켜봐야 하니까 내일 퇴원해요.”
‘ 내일 센터에 가야 하는데.’
연이는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고민됐지만 그건 차차 생각해 보기로 맘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