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른 Jul 26. 2022

고요하되 강렬하게, 눈빛으로 외쳤던 애틋한 사랑 한 줌

영화 <색, 계> (色, 戒: Lust, Caution, 2007)

<색, 계>는 언더커버 장르와 로맨스를 적절히 버무려 관객이 긴장감 속에서 두 사람의 관계성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몰입해서 바라보도록 만든다. 대학생이었던 왕자즈는 친일파 핵심 간부인 이를 암살하기 위한 목적으로 위장 투입된다. 항일을 위해 시작했던 자즈의 언더커버는 점점 이와 자즈을 더 가까운 관계로 만들고 이내 사랑에 빠지게 한다. 영화는 자즈의 시점인 듯 보이지만 그의 감정을 수면 위로 절대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이를 유혹해야 한다는 목표가 자즈의 진심을 오묘하게 감춘다. 신기하게도 오히려 타자인 이의 감정이 화면에 잘 묻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자즈에게 쉽게 몰입하지 못하고 관찰자가 되어 그의 동태를 관음 한다.  

작품의 중심인물인 자즈는 관객과도 분리될 뿐 아니라 작 중 다양한 사람으로부터 철저히 대상화된다. 대학에 와서 호감을 느꼈던, 어찌 보면 모든 것의 시작이기도 했던 광위민에게조차 이용당한다. 위민에게 자즈는 이성적으로 매력적이긴 했지만, 항일을 위해 마땅히 효과적으로 쓰여야 있는 물건에 불과했으며, 국민당 요원들에게도 그는 미인계와 막 부인으로서 얻었던 기존의 애정을 적절히 버무릴 수 있는 매력적인 수단이었다. 자즈의 감정은 친일파의 핵심 간부를 암살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고, 그로 인해 그가 떠안게 되는 절망과 수치는 오롯이 자즈의 몫이었다. 물론 이도 그를 이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젊고 똑똑한 여성으로서 자즈는 이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고, 처음엔 탐닉의 대상으로 자즈를 다뤘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자즈를 통제했고, 폭력을 일삼으며 육체적으로 대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즈가 마지막에 이를 선택했던 이유는, 그러니까 ‘도망쳐요’라고 짧게 외쳐 그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왔던 이유는 그의 눈빛과 따뜻한 손에서 진심을 봤기 때문일 테다. 더 이상 이에게 자즈는 섹스를 위한 여자 1이 아니라 마음을 내어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버린 셈이다. 자즈 또한 줄곧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하는 외로운 인물이었으니 이의 진실된 사랑이 항일이라는 거대 담론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던 건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와 자즈가 쌓아 올린 사랑의 처음은 상당히 은밀하고 금지된 것이었기 때문에 언어적 행위로 마음을 전달할 수 없었다. 대신 눈빛을 교환하며 매혹적으로 또는 직관적으로 서로의 감정을 표현한다. 사랑의 시작 앞에서 눈빛만큼 감정을 거짓 없이 적극적으로 전달하는 수단도 없다. 낭만적인 사랑을 자주 읊조리곤 했던 양조위의 눈빛은 주름과 함께 농익어가면서 선악을 가늠치 못하는 묘한 느낌의 매력을 풍긴다. 탕웨이의 둥글고 커다란 눈망울은 때론 순수한 대학생이 되다가 가늘고 길게 치켜뜨는 순간 누구보다 고혹적으로 상대의 넋을 빼놓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마지막을 가늠케 하는 절벽 위에서도 위민과 자즈는 말없이 눈으로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고, 종이 울리는 빈방에서 이는 떨리는 눈으로 허공을 직시하기도 한다. 작품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여러 개의 눈빛은 때로는 말보다 훨씬 더 강력하면서도 아릿한 장치로서 자리 잡는다.

조국에 대한 사명감과 한 사람에게 가닿은 사랑의 간극 사이에서 생겨난 엄청난 부담감은 개인이 감당하기에 너무도 거대했다. 철저하게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었고, 행복한 결말 따위는 기대할 수 없었던 관계였다. 격동의 역사적 흐름 앞에서 애틋한 사랑에 희망을 담기엔 불가능했다. 하지만 비극적 결말이 눈에 더 밟히는 법이다. 절망적 현실이 지속되었던 중국의 현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었을까? 자즈와 이의 가슴 저린 감정은 관객의 품을 오랫동안 휘젓기에 충분했다.


Written by 나른

매거진의 이전글 B급과 S급의 경계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