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와 실리 사이
유학생, 특히 뉴욕의 유학생은 의외로 손님맞이를 많이 한다. 친구의 휴가, 친구의 출장 또는 지인의 비행(승무원 지인..), 하물며 친구의 친구가 뉴욕에 들를 때도 불러내곤 한다. 대개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도시에서 지내는 가난한 고학생을 위로할 명목으로 한인타운에서 뜨끈한 국밥을 사주거나, 로어 맨해튼이나 웨스트빌리지의 로컬 카페에 데려가 주기도 하는데, 가족 하나 없는 외로운 독거유학생은 그게 그렇게 고마워서 애정에 목마른 뭐처럼 뛰쳐나간다.
그날 역시 친구가 연락을 했다. 그녀는 미국 동부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기업견학 일정과 인턴십 인터뷰들이 잡혀서 클래스 전체가 맨해튼에 들른다고 했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본격적으로 닥치기 몇 개월 전이었는데 MBA 과정 학생들은 아직 그 내막을 피부로 느끼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나 역시 전혀 체감하지 못했다. 그저 친구를 만날 생각에 신이 나서 달려갔을 뿐이다.
친구와 친구의 그룹 무리가 보였다. 대부분은 정장 차림이었고, 몇몇은 답답한지 복장을 느슨하게 풀어헤치고 있었다. 개중 한 백인이 눈에 띄었는데, 등산용 배낭을 메고 스포츠용 반바지와 기능성 소재로 된 티셔츠에 러닝화까지 완벽하게 환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남은 시간 동안 다른 무리와 떨어져 맨해튼을 뛰면서 관광할 거라고 했다. 투어용 2층버스는 아니더라도 지하철이나 택시로 이동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일 텐데 왜 저러나 싶었다. ‘땀나게 왜 뛴다니? ‘ 친구한테 한국어로 소곤대며 그 그룹과 작별했다. 허세도 참 가지가지네, 저런 식으로 튀고 싶어 하는 건 미국사람들 종특인가, 뭐 그런 생각도 잠시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십수 년이 흘렀다.
우리나라에서도 러닝이 유행하더니, 올해는 더더욱 유행을 한다. 그냥 달리는 것에서 벗어나서 존투러닝, 슬로우러닝 등등 새로운 주법이나 러닝방식들이 세분화되기 시작한다. 한강이나 트랙 말고 도심을 달리는 시티런도 급부상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오고 말았다. 런트립. 런트립은 달리기(Run)와 여행(Trip)을 합친 말인데, 말하자면 달리기 하러 여행 가고, 여행 간 김에 달리기도 하는 것.
오래전 비효율적이라고 무시했던 그 여행방식이, 이제 우리나라 러너들 사이에서 트렌드랜다. 여행지를 속속들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고, 걷기보다는 뛰는 게 더 빠르니 개중에는 효율적이기도 하다. 마라톤 인프라가 잘 되어있는 일본에서 러닝도 하고, 주변 구경도 하고, 러닝제품을 구매도 하는 등 러닝 테마의 여행이 떠오르더니, 아예 현지 마라톤을 참가하기 위해 여행을 가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최근 국내 메이저 마라톤대회 접수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니 ‘이럴 거면 해외에서 대회를 나가고 말지’라며 해외행을 선택하는 것과도 연관 있을 것이다. 차나 지하철에 갇히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어서 실용적이고, 국제 마라톤 대회를 나가면 자랑거리도 되고, 여행을 갔으니 SNS에 업로드할만한 사진도 챙길 수 있고, 이쪽저쪽으로 아주 괜찮은 선택인 듯하다. 게다가, 익숙한 동네와 익숙한 루트를 벗어나 낯선 곳에서 달리기를 한다는 건 무척 설렐 것 같다. 필시 좋은 자극이 될 게다.
지난 주말, 부모님의 생신을 맞아 온 가족이 부여로 여행을 다녀왔다. 부여 시내는 경주보다 훨씬 작았는데, 유적지와 관광지들이 반경 4km 안에 오밀조밀하게 모여있었다. 이런 곳이야말로 런트립하기에 딱 좋은 곳이겠구나 싶었다. 숙소로는 한 배우의 아버지가 운영한다는 한옥고택 펜션에 묵었는데, 부여 중심지에서 꽤 떨어진 곳이라 마치 예능프로 ‘삼시 세 끼’ 에나 나올법한 시골길 위에 있는 펜션이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전날 못 뛴 게 못내 아쉬웠다. ‘나 사는 동네 뛰는 거 아니면 이게 런트립이지’ 하는 생각이 들어 근방을 뛰기로 했다. 구름 많은 아침 7시, 인적 없는 시골길에서의 러닝은, 결론적으로 낭만이라기보다는 공포 쪽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커피프린스] 보다는 [추격자] 부류라고나 할까. 널찍이 떨어진 옆옆집에서는 내 발소리를 들은 시커먼 색 대형견이 연신 컹컹거리며 짖고 있었다. 내 키만 한 몸집의 개는 힘도 엄청나서, 목줄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이 팽팽하게 당겨져 개집에 연결되어 있었고 목줄이 끊어지는 순간 튀어와 내 허리도 끊어먹을 것처럼 흥분한 상태였다. 뒷덜미 털이 쭈뼛 서는 걸 느끼며 황급히 그 집을 지나쳤더니 이제는 갑자기 퇴비 같은 분뇨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저 앞으로 축사가 보이고 새벽부터 사람들이 일을 시작한 건지 멀리서 라디오 소리도 웅얼웅얼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이 길 위에는 오로지 나뿐, 지나가는 사람은 물론 없고 어떠한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옆으로 포터 트럭이 스윽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곳이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내가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더워서인지 긴장해서인지 등에서 또르륵 땀이 굴러 떨어졌다.
그렇게 내 시골길 러닝이 종료되었다. 허세로 시작한 부여 시골길 런트립은 2km 도 못 가 본전도 못 찾았다. 다음번에는 좀 더 번듯하고 인적 많은 길을 뛰어봐야겠다. 이를테면 맨해튼이나.. 맨해튼 같은 곳 말이다.
-FIN
우리나라만 런트립 유행인 건 아닌 듯. https://gorunningtours.com/p/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