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살이도 대감집에서 하랍디다
지난 6월 7일 있었던 제 1회 전주마라톤대회에서는 유례없는 논란이 일었다. 10킬로미터(10K) 대회라고 해서 나갔는데 뛰고나니 스포츠워치에는 8.5킬로미터가 찍혀있더라는 성토가 러닝 커뮤니티마다 넘쳤기 때문이다. 살다살다 본인 10K 기록이 마라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엘리우드 킵초게 수준으로 올라갈 줄은 몰랐다는 후기들도 있었다. 10K 코스를 뛰어야 하는데 반환점 안내가 잘못되어 5K 코스로 뛰어버렸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줄 안내도 되지 않아 메달과 간식을 받는데만 몇시간이 걸렸다는 불만도 터져나왔다. 결국 언론에 기사화가 되었고, 주최측은 앞으로 해당 대회를 영구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첫 대회가 마지막 대회가 된 셈이다.
운영이 엉망이었던 대회는 이전에도 있었다. 작년 10월 있었던 제 1회 국제 국민 마라톤. 하프코스 완주 메달에 영어로 HALF 가 아니라 HAFE 라고 각인해버려서 ‘국국마’ 라는 약칭대신 ‘하페 마라톤’으로 더 유명해졌다. 코스안내나 급수대 운영도 문제였고 하프코스와 10K 코스 참가자들이 같은 길에서 엉켜서 주로는 아수라장이었다고 한다. 중학생도 틀리지 않을 스펠링도 틀리고 대회 기본 운영도 못하면서 어떻게 ‘국제’ 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냐며 많은 참가자들의 빈축을 샀다. 게다가 10월에 벌어진 대회인데 영문 기록증에는 12월(December)로 표기되어서 많은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언제부터 10월이 디셈버가 되었는가!
이쯤되자 러너들 사이에서는 ‘1회 대회는 일단 걸러야 한다’ 는 말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마라톤 대회는 혹서기와 혹한기를 제외하고 1년에 약 7개월 정도에 걸쳐서 진행된다. 작년 한해에는 약 400 개의 마라톤 대회가 있었다. 매주 주말 아침에는 서울에서만 여의도, 상암, 뚝섬, 광화문 적어도 한 곳 이상에서는 러닝이벤트들이 개최되고 있고 러너들이 뛰고 있다는 말이다. 그 모든 대회를 다 참석할 수는 없으니 비교적 검증이 된 대회를 나가겠다는 뜻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러닝 붐을 타고 많은 러닝대회가 신설되고 있는 실정이다. 주말 오전에 반짝 경기를 진행하면 몇 억을 땡길 수 있다며 달려드는 업체들도 있다. 인당 참가비 7만원에 1만명이 참가하면 7억 매출이니 군침이 날만도 하다. 안타깝게도 대회 퀄리티와 운영력은 보장되지 않는다. 이런 판국에 아무 검증되지 않은 신생대회에 출전해 본인의 돈과 시간을 베팅하는 결정은 대단히 비이성적인 선택이다.
온갖 대회가 춘추전국시대처럼 난무하니 러너들은 유구한? 표현도 끄집어 왔다. ‘머슴살이도 대감집이 낫다’는. 대형 스포츠브랜드나 대기업이 주최하는 대회일수록 운영이 깔끔하고 기본 이상은 한다며.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을 줄 안다고 이름값있는 주최사가 개최하거나 몇 회 이상 개최된 짬바있는 대회일수록 사은품이 많으며 협찬 부스가 많아서 건질 게 많다는 것이다. ’혜자 대회’ 또는 ‘근본’이 있는 대회라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대회 몇 곳은 쾌적하게 뛰고 즐기고 맛있는 간식을 먹고 양손가득 무언가를 들고 돌아온다는 보장을 받는다. 어쩌다보니 지난 4월과 5월에 참가했던 두 개 대회에서 전혀 다른 사용자경험을 했고, 대감집 머슴살이의 위력을 경험했다. 지난 4월에 있었던 [YMCA 마라톤]과 5월에 뛰었던 [포레스트 런]에서 말이다.
4월 YMCA 마라톤은 광화문과 청계천을 따라 도로를 막고 하는 행사라길래 참여했다. 과연, 코스 빼고는 모든 게 별로였다. 운영인력이 적어서 급수대운영이 원활하지도 못했고, 꼭 YMCA 본사 앞에서 대회를 끝내야 한다는 취지때문에 수천명의 인원들이 종각 젊음의 거리에 엉켜서 줄을 서는 과정은 당혹스러웠으며, 몇 년 전에 이태원에서 있었던 사건이 생각나 불편했다. 이벤트 부스들이 거의 없기도 했거니와 기념사진 찍을 엄두도 나지않아 완주메달과 간식꾸러미를 받자마자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해 빠져나왔던 기억이 있다. 근처 까페로 들어가 간식꾸러미를 여는순간, 앞으로 이 대회는 절대 나오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간식이 이온음료와 초콜릿바 달랑 두 개라니. 참가비를 7만원이나 받으면서 완주자에게 소보로빵 하나 안 준다는 데서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다(역시 먹는 걸로 빈정 상하니 답이 없다.) 작년 11월에 대회를 개최하고 반년도 안되어 또 마라톤 행사를 치르는 걸 두고 주최측이 돈독이 올랐나보다며 사람들이 비꼬았는데, 참가비 대비 간식을 받고나니 의심이 확신이 되었다. 돈에 환장한 거 맞구나… 주최사는 올 9월에 또다른 대회를 진행한다고 한다, [제1회 어스마라톤]. 간식에 배신당한 나는 접수하지 않았지만, 이 대회 역시 성황리에 접수마감 되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5월의 포레스트런은 참가신청이 치열했다는 것만 빼고는 모든 게 다 좋았다. 현대자동차 그룹의 스폰서를 받아 진행되는 마라톤인데, 신청비가 3만원으로 싼데 그마저도 내 이름으로 기부금처리되니 체감 참가비는 0원. 여의도공원을 출발해 서강대교를 넘어가 반환점을 찍고 다시 돌아오는 코스로 넓은 주로를 달리는, 폐쇄공포 따윈 얼씬도 못할 경험이었다. 곳곳에 배치된 진행요원들, 상시대기하고 있던 앰뷸런스와 의료진이 불의의 사태에 대기하고 있었고, 급수대 또한 넉넉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간식도 넉넉했지만 경기 이후 여의도공원에 설치된 협찬사 부스들은 마치 축제 수준이었다. 파리바게트 부스에서는 사람들이 룰렛판을 돌려 빵봉지를 종류별로 얻어갈 수 있었고, 이니스프리 부스에서는 화장품 체험키트를 받아볼 수 있었다. 배우 박정민의 커피차가 무료음료를 제공하고 있었고 이외에도 많은 체험부스가 있었다. 본인의 기록이 나오는 기록존에서는 기념촬영을 할 수 있었는데 YMCA 가 기록존이 단 두대였는데 (그마저 한 대는 나중에 고장났다고 한다) 포레스트런의 기록존은 네 곳에다가 진행요원이 배치되어 혼자온 참가자의 사진을 찍어주는 서비스도 하고 있었다.
이걸 보니 왜 머슴살이도 대감집이 나은지, 경력같은 중고신입을 사장님들은 왜 찾는지 알 것 같다. 바로 알잘딱깔센의 근본이자 스케일이 언아더레벨이니까. 보고들은 게 다르니 아웃풋도 다르고 취급하는 품목이 다르니 스탠다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악착같이 돈벌려는 주최측과 마케팅 예산으로 행사 치르려는 주최측이라니, 같은 러닝이벤트 카테고리 안에 묶여있지만 실상은 전혀다른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다만 대회 참가자 입장에서는 똑같이 내 시간, 내 다리와 에너지를 들여서 참가하는 대회들이라는 공통분모만 있을 뿐이다. 기왕이면 좋은 대회, 기왕이면 쾌적한 환경에서 내 노력을 투자하고 싶은데 요즘은 수요보다 공급이 후달리는 관계로 후진 퀄리티의 행사도 날개돋힌 듯이 소비되는게 못내 아쉽다. 갈수록 대회 참가비도 비싸지는데.. 내 돈과 시간은 소중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