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고는 들어봤는데 써보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혹시 무슨 일로 연차를...?"
"아, 개인적인 일 때문에요 :) "
"무슨 일인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아, 그게 개인적인 일이라 말씀드리기에는 좀... :)"
"아, 좋은 데 가시나 봐요"
"네, 개인적인 일이라서요 :)"
전에 다니던 회사 부장님과의 대화였다. 연차를 낼 때마다 거쳐야 하는 관문과도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대체 왜 남의 연차가 궁금한지 모르겠다. 직장인이 연차 낼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병원 등의 볼일이 있거나 여행, 그도 아니면 늦잠 좀 자고 싶은 것 말고 무슨 큰일이 있겠는가. "아, 제가 내일 늦잠 좀 자고 일어나 배 긁으면서 무한도전이 좀 보고 싶어서요"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오기가 발동해 그 직장에 다니는 3년 동안 단 한 번도 내 연차 사유를 밝히지 않았다.
나에게 연차란 그런 것이었다. 금고에 넣어둔 금괴처럼 보기만 해도 뿌듯했다. 엄마가 숨겨둔 사탕바구니에서 사탕을 하나씩 빼먹듯이 야금야금 써먹었다. 돈 주고도 못 사는 것이 연차니 말이다. 그렇다고 뿔난 망아지처럼 내 멋대로 연차를 사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상사와 조직의 눈치를 안 보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처음 임신을 하고 집에만 있을 때는 매일 쉴 수 있어 행복했다. 하지만 그 열 달이 종신형 인생 시작 전의 마지막 휴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엄마가 되고 나니 쉰다는 것은 '생리휴가'와 같았다. 있다고는 들어봤는데 써보지는 못하는 것이 똑 닮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생각해 볼 지점이 있다. 왜 여성들의 생리휴가는 근로기준법 73조에 기록될 만큼 법적으로도 인정해주는 걸까? 그만큼 생리통이라는 통증이 정신과 육체적으로 만만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래도 보통인 편에 속했다. 허리가 끊어지고 아랫배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면 타이레놀 한 두 알 정도로 해결이 되는 편이었다. 하지만 간혹 생리통을 심하게 앓는 친구들은 제대로 앉아있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문제는 몸만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호르몬의 영향이 높았다. 이유 없이 신경질이 나고 화가 솟았다. 허리랑 배는 끊어지는 것 같지, 신경은 곤두서 있지... 이 총체적 난국을 1년이면 12번씩 겪어야 했다. 혼자 몸일 때도 힘들던 것을 이제는 3살, 4살짜리 아이 둘과 치러야 하다니. 평소에 잘 넘기던 일에 빽! 하고 언성을 높이는 날이면 마음이 힘들다.
마흔이 넘어도 엄마 말을 안 듣는 내가, 이제 고작 삼십몇 개월을 산 아이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하찮아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 날이면 자괴감을 이불 삼아 울적한 기분으로 잠이 든다.
특히나 여성의 일생 중 임신 기간의 호르몬 수치는 정점을 찍는다. 작은 것에 슬프고 서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높아진 호르몬 수치는 출산 후에도 얼마간 이어진다.
둘째를 출산 후, 두 달쯤 지났을 때였던 것 같다. 늘 화장실을 참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둘째는 툭하면 싸고 울고 토해대지, 첫째도 엄마 주변만 맴돌며 놀던 때였다. 그와 반대로 아무 때나 화장실에 들어가 볼일을 보는 남편이 너무 얄미워 볼멘소리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뒤로 남편은 한동안 본인의 화장실 사정을 나에게 물었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쌈닭, 혹은 투견에 가까웠다. 그게 다 호르몬 때문이니, 숨을 크게 쉬고 마음을 고르면 된다는 여유로운 생각 따위는 할 수 없었다. 흡사 이 구역 미친년에 가까웠다. 정말 딱 하루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곳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쉬어보고 싶었다. 밤에도 아이 발길에 차여 몇 번씩 깨는 선잠이 아니라 푹 자보는 것이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되었다.
아빠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겠지만, 아이를 키우기 시작한 엄마에게는 쉼이 필요하다. 어떻게 돌도 안된 애를 떼놓고 하루 편히 나갈 수 있겠느냐만은. 의도적으로 애써서 가져야 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에게 온통 향해있는 생각의 고리를 한 번씩 끊어줘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라는 존재와 고요를 채워줘야 한다.
남편은 생각보다 아이들을 잘 돌보고, 아이들 역시 엄마 없이도 잘 지낸다. 오히려 서운할 정도로 잘 놀고 잘 먹고 잘 잔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하루 어설프게 지낸다 해서 아이의 일생에 큰일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최선을 다해 쉬어야 최선을 다 할 수 있다.
아이에게도, 나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