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이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끼고 운동화를 신었다. 집에서 5분 거리의 어린이대공원으로 걸어갔다. 이른 아침이라 근처에 살고 계신 주민들 몇 명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햇빛도 찬란하고 새소리도 들렸다. 여기저기 온통 푸른빛이다. 오늘은 이어폰도 가져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귀도 쉼이 필요한 날.
어제 큰 아들은 연락이 되지 않은 채 새벽 1시가 다되어 늦은 귀가를 했다. 하고 싶은 잔소리는 많았지만 입시를 앞둔 고3이라 대놓고 할 수 없었다. 꿀꺽 삼킨 말은 내 가슴 저 안쪽으로 묻어두었다. 요즘 코로나로 온라인 수업을 듣는 둘째 아들은 침대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의 영원한 사랑 스마트 폰과 함께 둘이 하나가 되는 초유의 경험을 결국 하려나 보다. 그 모습을 며칠째 쳐다보며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역시 내 가슴 저 안쪽으로 묻어둔다.
다음 주에는 내가 일하고 있는 대학교에서 여름방학 대비 진로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한다. 올해 처음 시행되는 프로그램이라 예산을 편성해서 품의까지 올려야 하는 일이다. 이전에는 행정직원들이 하는 업무였지만 지금은 인력난으로 프로그램 진행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맡아서 해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그만’을 외쳤다. 그만 생각하자. 오늘은 토요일 아침이고 주변은 조용하며 풀냄새 가득한 잔디에서 푸른 나무와 들꽃 들을 바라보며 나만의 무념무상 시간을 갖기로 했으니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아들의 사춘기를 겪으며 머릿속이 복잡하거나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무작정 걸었다. 한두 시간쯤 걷고 나면 화도 가라앉고 복잡한 생각도 잠잠해졌다. 누군가에게 나의 고민을 토로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한 방법이겠으나 내 얘기를 들어줄 적절한 상대방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나는 걷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게 걷기 시작한 것이 3년이 되어간다. 처음 걸을 땐 한강변도 걸었고 동네 골목길도 걸었고 큰 차로 변도 걸었다. 그러나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은 푸른 자연이 있고 주위가 조용한 집 앞 공원이었다. 눈앞으로 넓게 펼쳐진 잔디와 우거진 나무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대학에서 진로상담일을 하면서 나의 귀와 머리와 입은 항상 피곤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런가?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고 나도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한적한 공원이 좋았다.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치유능력이 이런 것일까?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다음 주에 고성에 가려고 하는데 괜찮아?”
“강원도 고성?”
“응. 오랜만에 바다 좀 보고 오자.”
“바다. 좋지!”
3년째 걷고 있지만 공원만 걷는 것은 아니다. 전국 방방곡곡 대자연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려고 한다.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눈과 머리가 정화되면서 세상사 별거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모든 것은 각자가 해결하는 것인데 내가 타인의 행동과 고민에 깊게 개입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또 한 가지 이치를 깨달아 가며 성숙해지는 것이겠지.
1년 전 낙산사에서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한참 울었다. 이렇게 거대하고 고요하고 아름다운데 난 왜 그렇게 옹졸하고 시끄럽고 못나게 살아왔는지. 작년 가을에 걸었던 월정사 솔밭 길은 한해를 반성하게 만들었다. 때가 되면 나무들도 잎을 떨어뜨리며 겨울을 준비하고, 근처에 서식하는 다람쥐들도 겨울 먹잇감을 모으느라 저렇게 분주한데 나는 무엇을 준비하며 살고 있는지. 38선 휴게소 앞바다에선 파도에 서핑하는 서퍼들을 보며 뭔가에 몰입하는 삶이 개인에게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 그들의 까맣게 탄 얼굴을 보며 느낄 수 있었다. 파도 타는 그들을 멀리서 바라보며 나도 몰입할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이번에 가는 고성에서는 동명항의 푸른 바다를 보고 진입로가 1킬로미터가 넘는 화암사의 숲길을 걸어볼 생각이다. 밥 대신 꼭 햄버거 따위의 정크 푸드를 만 이천 원이나 지불하고 사 먹는 대쪽 같은 큰아들과 식탁에서도 화장실에서도 심지어 샤워를 하면서도 스마트폰을 절대 놓치지 않는 일편단심 민들레 같은 작은아들을 생각하며 그동안 내 가슴 저 안쪽에 묻어둔 말들을 숲길에서 천천히 토해내야겠다.
대자연이 주는 안식과 거대한 교훈을 받아 또 한 동안 버틸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