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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룰 Mar 12. 2022

냉장고 원피스 찬양

주제: 좋아하는 입을거리

코로나 4단계로 출퇴근을 거의 하지 않았던 올여름, 그나마 종종 지나치는 지하철에서 나는 운명의 옷을 하나 만났다. 바로 냉장고 원피스. 강력한 색상, 큼직한 플라워 패턴이 뿜어대는 촌스러움과 모나미 매직으로 거침없이 적은 '현금가 10,000원' 팻말 사이에서 나는 발견했다. 그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하늘하늘한 잔꽃 무늬 냉장고 원피스를.


단돈 만 원에 구입, 아니 구조한 원피스는 막상 입고 보니 패턴이 예쁜 것과는 별개로 누가 봐도 지하철에서 구매한 냉장고 원피스였지만, 낮 최고 기온이 33도에서 35도를 기록하는 폭염 속에 그만큼 시원하고 또 금방 마르는 가성비 넘치는 실내복이 또 있으랴. 무엇보다 미끈한 재질로 고양이 털까지 묻지 않아 쾌적하기까지! 좋아, 이건 합격.


점점 비싸지는 잠옷 가격을 향한 약간의 반항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감성 브이로그에 어울리는 잠옷을 입고 침구에 필로우 미스트를 뿌리며 나를 챙기는 밤도 좋지만, 신축성 좋은 원피스 끝단을 발꼬락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괜히 쭉 늘려보았다가 양반다리를 하고 TV 앞에서 맥주 한 캔 까는, 그런 게 필요할 때도 있거든. 왠지 더 여름 같달까.


그 뒤로 나는 '지하상가+냉장고' 재질의 옷들을 살펴보는 걸 좋아하게 됐는데, 마냥 촌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쳤던 패턴들 속에서 귀여움을 발견하는 순간이 좋았다. '어머, 이런 말도 안 되는 색 조합이라니!', '이렇게 과감한 튤립 패턴이라니!', '가히 마리메꼬라고 우겨도 되겠어!' 하며 원피스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옷들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를 알아봐 주는 젊은이는 네가 처음이야.'라는 목소리를 얼핏 들은 것 같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아침, 저녁 바람이 달라졌다. 지나친 폭염에 언제 끝나냐고 되묻던 여름은 '냉장고 원피스'를 옷장 깊은 곳에 넣으며 자연스럽게 가을이 되고 또 겨울이 되겠지만, 내년 여름이 오면 또 만나자고! 내 여름의 즐거움.



글. 이룰 @yirul



<다함께글쓰계> 함께 쓰고 모으는 글쓰기 계모임. 내가 쓴 글은 한 편이지만, 같은 주제로 쓴 다른 글들이 모였을 때 생기는 즐거움을 느끼며 브런치, 인스타그램(@together.writer)에 함께 글을 써갑니다. 2021년 8월부터 시작된 혼자 쓸 때보다 다 함께라 재밌고 든든한 글쓰기 계모임. 함께 글 쓰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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