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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영칼럼니스트 Aug 28. 2020

회사에서 나를 비추는 거울은 누구?

동료라는 거울이 없으면 고집쟁이 꼰대나 외톨이가 된다.

   

“당신이 지금 뭘 잘못했는지 알아, 김00씨는 너무나도 어이없는 행동을 했단 말이야, 초등학생도 아니고, 어떻게 여직원과 그런 한심한 일로 싸울 수 있어?”


필자가 조그만 자회사의 임원을 겸직하던 때의 일이다. 같은 팀에 근무하던 남녀직원 두 명이 크게 다툰 적이 있다. 둘은 평소에도 사이가 원만치 않아 자그만 일로도 티격태격하곤 했는데 그날은 작은 말다툼으로 시작되어 서로 간 고성이 오가는 싸움으로 커졌다. 종국에는 여직원이 울며불며 팀장에게 더는 같이 일하지 못하겠다며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일로 필자는 여러 사람과 면담을 하였는데 자초지종을 듣고서 어이가 없었다. 초등학교에서나 있을 법한 사소한 일이 원인이 되었고 그간 서로 쌓인 불만이 누적되어 격한 감정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직장이란 일터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그래서 남자 직원을 불러 서두의 얘기로 야단을 친 것이다.


그때 꺼낸 말이 “김00씨는 회사에서 당신을 비춰주는 거울이 있느냐, 있다면 당신은 그 거울에 어떻게 비칠 것 같으냐”라는 ‘거울론’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그 직원은 기질이 독특하여 평소 동료들로부터 자주 원성을 샀는데 다른 직원들은 표현에 조심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직원은 자신의 언행이 남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도 잘 모르고 직원들이 불편해하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거울론’은 필자가 직장에서 많은 사람을 접하고 다양한 경험을 체험하면서 느낀 ‘성찰론’이다. 사람은 성찰의 과정을 통해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도 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는데 그러려면 나의 내면과 허물까지 비춰주는 거울이 있어야 하며 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깨닫고 다듬어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부처님처럼 스스로 고행을 통해 삶의 진리를 깨닫는 성인이라면 모를까 혼자만의 힘으로 성찰하기란 쉽지 않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비춰주는 거울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또 이를 겸허히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거울에 비친 나의 언어와 행실을 보며 부족하거나 잘못된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변화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직장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혁신이며 성장이다.


필자는 직장에서 잘못된 행동의 반복과 거듭된 불통으로 원성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회사에서 나를 비춰주는 거울은 누구이며 나는 그 거울에서 무엇을 보는가’라는 물음에 자문자답하곤 했다. 직장의 경력이 쌓이고 직책이 올라가면서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운전하며 차선변경을 할 때 뒤나 옆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 반드시 봐야 할 사이드미러나 백미러와 같다. 이러한 거울이 없다면 운전을 제대로 할 수 없듯 삶이란 운전에도 거울이 없다면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지금 우리가 쓰는 거울은 고대시대 놋쇠로 시작하여 로마 시대 청동거울로 보편화 됐다고 한다. 거울이 생겨나면서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곧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거울의 본질적 기능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비춰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특히 신체 중 다른 부분은 다 자기 눈으로 볼 수 있어도 얼굴만큼은 가능하지 않다. 거울이 아니고선 확인할 수 없다.


내 얼굴 모습을 모른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불편한 일이어서 거울의 존재에 감사해야 할 것 같다. 거울은 그래서 모든 공간에 존재한다. 가정에도 직장에도 도시 곳곳에 거울이 있다. 회사에선 자기 자리에 손거울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매무새를 다듬기도 한다.


겉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 필요한 것처럼 자신의 행동거지를 비춰주는 거울도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직장 동료, 가족, 친구 등 나와 삶을 같이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어떤 형태로든 나의 모습을 반사해주고 있다. 그 거울에서 참모습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이란 거울’은 진솔하게 비춰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거울로부터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감사이다. 그 모습으로부터 바른 방향으로 가거나 더욱 새로워질 기회를 찾을 수 있다.


앞서 김00씨는 이러한 거울이 없었다. 주변에 아무도 거울이 되어 주지 않았다. 그것을 본인만 모를 뿐이었다. 자신의 행적을 되돌아보지 않던 그 직원은 주변 직원들에게 문제가 되곤 했는데 마침 그 사건이 기회가 되어 필자가 솔직하게 상황을 피드백할 수 있었다. 이후 쉽게 고쳐지진 않았지만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처럼 불편하게 하는 사람에겐 누구도 거울이 되어 주지 않거나 아니면 제대로 반사해주지 않는다.


조직에서 거울이 없는 대표적인 사람은 독재적 리더이다. 특히 장기집권하는 독재형 보스에겐 자기를 비추던 거울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한때는 거울이 되어줬던 사람들이 곁을 떠나기도 하고, 남아 있더라도 더는 거울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때로는 독재형 보스가 스스로 거울을 아예 치워 버리기도 한다. 자기를 비춰주는 것 자체가 싫은 것이다. 말로가 불행했던 지도자들이 그랬다.


거울이 없는 사람에게 더욱 불행한 것은 거울이 없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위기상황보다 더 위험한 것은 위기의식이 없는 것’과 같다.


거울이 없는 것을 인지하지 못해서 생기는 일은 끔찍하다. 피드백을 받지 못하고 거짓과 위선만 보니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를 모른다.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없어지고 일방만 존재한다.


거울이 없는 리더에겐 아부와 거짓이 득실거린다. 잘못을 잘못으로 인지하지 못하여 같은 잘못을 되풀이한다. 초심을 잃고 방향감각이 없어져 나침반이 없이 암흑의 밤에 항해하는 배와 같이 된다.


반대로 거울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잘한 것도, 못한 것도, 실수도, 성공도 모두 조명할 수 있다. 자기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길을 가는지를 알 수 있기에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 하더라도 바로 진로를 수정할 수 있다. 거울이 되어 주는 동료나 파트너들이 다양한 방향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들과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더 많은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서 거울은 동반자요, 새로운 동기부여이며 동시에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발전소이다.    


역사에도 거울이 있다. 역사신학자인 임원택 교수의 저서인 ‘역사의 거울 앞에서’를 보면 ‘과거의 역사는 오늘을 비춰주는 거울이며, 역사의 거울에 현재의 모습을 비추는 것은 고통스런 과정이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역사의 거울은 현재의 추함과 역겨움을 그대로 비추어 주기 때문’이라고 봤다.


그래서 ‘자신을 비추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역사로부터 지혜를 배워 과거의 동일한 오류를 다시 반복하지 않고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의 역사철학자 에드워드 카의 유명한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도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수차례 언급했는데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 현재 상황을 더 잘 이해하고 발전적인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역사라는 거울은 과거 비슷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과 그 결과를 비춰주고 있으며, 현재 문제의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역사철학자 김상근 교수의 역작인 ‘군주의 거울’에서 보면 역사 속에서 본받아야 할 군주의 거울이 어떤 모습인가에 대해 과거 군주들의 행적을 통해 살펴봤는데 로고스(설득하는 능력), 에토스(감동시키는 능력), 파토스(고통을 함께하는 능력)를 군주의 3가지 덕목으로 봤다. 역사로부터 배운 대단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시대의 흐름에 역사라는 거울이 있듯이 현재라는 시공간을 사는 우리에겐 동료라는, 이웃이라는, 가족이라는 여러 거울이 있다.


거울을 보며 나의 외모를 다듬듯, 나의 거울이 되는 그들에게 자신을 비춰보며 마음 매무새를 다듬을 수 있다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란 말처럼 새롭게 다듬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역사의 거울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는 거울의 존재를 두려워해선 안 되며 그 거울이 비춰주는 나의 못난 모습을 피해서는 더욱 안 될 일이다.


거울이 없음과 함께 왜곡된 모습으로 비춰주는 거울도 경계할 일이다. 특히 힘이 세거나 고집이 센 사람일수록 제대로 된 모습으로 투영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주변과 소통에 문제가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진실이 아닌 왜곡된 모습을 받아들이면 고장 난 나침반에 의존하여 항해하는 것처럼 길을 잃는다.


직장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공통의 가치와 목표를 향해 가는 공간이며 업무를 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팀웍과 소통을 중시한다. 그래서 거울의 존재는 더욱 귀중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 거울이 되어 주는 사람은 누구인지 또 나는 누구를 비춰주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은 거울을 가진 사람이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은 거울이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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