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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곡동 서작가 Feb 28. 2021

10만 명 중 한 명, 희소한 만큼 불편한 일상

제13회 세계희소질환의 날을 앞두고

매년 2월 마지막 날은 세계희소질환의 날(Rare Disease Day)이다. 세계희소질환의 날은 유럽희소질환기구(European Organization for Rare Diseases)가 2008년 2월 29일에 처음 시작한 기념일로서, 2월 29일이 4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드문’ 날이라는 점에 착안해 이 날을 ‘희소질환의 날’로 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의 경우 이와는 별도로 5월에 ‘희귀질환 극복의 날’을 제정해 기념하고 있어서인지, 세계희소질환의 날에 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 같다.


10만 명 중 한 명, 희소한 만큼 불편한 일상


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희소질환 진단을 받았다. ‘클리펠-트레노네이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은 10만 명 당 한 명꼴로 나타나는 선천성 혈관 이상 증후군으로, 정맥, 모세혈관, 그리고 림프관의 이상증식으로 인해 해당 신체 부위가 과다성장하는 질환이다. 몸 군데군데 모세혈관 이상증식으로 인한 포도주 빛 얼룩이 있고, 장시간 서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흔히 나타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정맥 돌출(하지정맥류) 증상이 있으며, 림프관 이상으로 인해 오른쪽 다리가 왼쪽 다리보다 두 배 이상 부피가 크다. 당장 생명이 위험한 질환이 아니어서 무럭무럭 잘 자라고는 있지만, ‘다른 몸’을 가진 사람으로서 겪는 일상의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먼저, 주기적으로 대학병원 내 여러 과를 다니며 진료를 봐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성장하면서 혈관의 상태가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질 리 없는 질환이라서, 혈관외과, 영상의학과, 재활의학과, 정형외과까지 기본 네 개 진료과를 꾸준히 다닌다. 증상과 그에 따른 처치의 종류에 따라 피부과, 성형외과, 비뇨기과까지 추가로 보기도 한다. 림프관 이상으로 인해 감염에 취약한 구조라서 여름철에 모기에만 잘못 물려도 고열과 통증을 동반하는 급성감염을 겪는다. 그러면 대학병원 응급실에 가서 정맥주사로 항생제를 2박 3일씩 맞아야 한다.


관심이 적어서, 관심이 과해서 생기는 문제들


아파서 그런 것쯤이야 병원에 가서 처치를 받으면 되니 괜찮다. 살면서 병원 신세 한 번 안 지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아이 기르면서 한밤중에 응급실 문턱 안 넘어본 부모가 어디 있으랴. 문제는 이 질환의 희소성 자체에서 오는 의료진의 무관심, 그리고 그와 반대로 일반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 때문에 생긴다. 십만 명당 한 명에게 나타나는 희소질환인 만큼 병원에서도, 일상에서도 아이의 질환은 ‘너무 드물어서 낯선 것’으로 여겨진다. 몸 곳곳에 새로운 증상이 보여도 의사들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잘 모르겠다,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게 아니니 일단 그냥 두고 보자”라는 말이다. 이 질환과 관련된 국문 의학 자료가 너무 없어서 직접 영문 의학 논문을 찾아 읽고 번역해서 다른 부모들과 나누면서 산지도 벌써 만 6년이다. 새로운 약물에 대한 임상시험이 해외에서 진행 중이어도 관련 내용을 알자면 직접 해외 제약사나 연구진에게 이메일을 보내 알아봐야 한다.


반면, 아이와 외출을 하면 낯선 이들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아이 다리가 왜 그래요?”다.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내 아이의 다리를 보고 쯧쯧, 혀를 차거나 ‘이상하게 생겼다, 무섭다’고 소리를 지르며 쳐다본다. 놀이터에서도, 수영장에서도 아이 다리만 빤히 쳐다보며 맴도는 사람들을 만난다. 함부로 말하는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불쾌하다고 큰소리도 쳐보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드는 온라인 공간에 하소연인지 당부인지 모를 장문의 글도 남겨봤지만, 매일 스치는 수많은 사람에게 일일이 대거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우리에게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제한 코로나19 사태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인식 제고’가 중요한 이유


희소질환에 대해, 희소질환 당사자와 그 가족의 고충에 대해 널리 알리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잘 모르는 질환이어도 의사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함께 알아봐 줄 수 있도록, 길거리에서 생김이 좀 다른 사람을 마주치더라도 뚫어지게 보거나 불쾌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데 ‘인식 제고’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계 희소질환의 날 공식 홈페이지(https://www.rarediseaseday.org/)에 따르면, 세계 희소질환의 날은 “희소질환이 당사자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일반 대중과 정책결정자들이 알 수 있도록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희소질환 당사자/가족으로서 병원에 다녀보면 무관심하고 무례한 대처에 자주 실망하고, 때로는 분노하게 되는 게 현실이다. 요즘같이 정보가 빠르게 업데이트되고 공유되는 시대에, 어떤 의사들은 내 아이가 가진 질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면서 언제 적 자료인지 알 수 없는 종이 백과사전을 뒤져 옛 정보를 읊는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희귀질환 헬프라인’에 올라와 있는 자료 역시 최신 연구 결과 등의 자료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어 민원을 넣고 수정을 요청한 적도 있다. 물론 그마저도 호의적으로 받아주진 않는다. ‘비전문가’인 환자 부모가 주는 자료는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참고하겠다’ 정도의 답변을 받을 뿐이었다. 급성감염 증세로 응급실에 가게 되면 이 질환을 잘 모르는 응급실 의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게 되는데, 그런 내게 ‘당신이 의사라도 되느냐’며 힐난하는 자를 의사랍시고 맞닥뜨리는 바람에 멱살을 잡을 뻔한 적도 있다. 이처럼, 희소성으로 인해 병원 안에서는 외면받고, 병원 밖에서는 구경거리 취급을 당하는 게 우리 같은 희소질환 당사자/가족의 삶이다.


희귀질환관리법, 무엇을 위한 법인가


우리나라는 2016년에 처음으로 희귀질환관리법을 도입했다. 희귀질환관리법 제4조는 “희귀질환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높이고 희귀질환의 예방, 치료 및 관리 의욕을 고취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희소질환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높이는 작업을 과연 하고 있는지부터 의문이다. 2014년부터 직접 환자단체를 꾸려오고 있는 나는, 신규가입자를 맞이할 때마다 모든 걸 0에서 시작하는 기분이다. ‘엄마가 임신 기간에 뭘 잘못해서’ 아이가 질환을 갖고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여전하고, 학교에서, 거리에서, 직장에서 희소질환자로서의 삶을 이해받기는커녕 도리어 차별받는 당사자의 상황도 여전하다.


게다가 “희귀질환의 예방, 치료 및 관리 의욕을 고취시키”겠다는 말은 아무리 봐도 곱게 들리지 않는다. 희소질환은 많은 경우 유전자변이로 인해 발생한다. 내 아이가 겪고 있는 질환은 특정 유전자가 배아 발생기 어느 시점에 돌연변이를 일으켜 초래된다. 또, 이 질환은 현재로서는 치료법이 없다.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약물에 대해 국제적으로 임상시험이 진행 중이지만, 환자 규모가 적은 한국은 임상시험 참가국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의사들 중에도 이 임상시험에 관심을 보이는 의사가 전국적으로 한두 명 있을까 말까다. 혹여 오랜 임상시험과 검증을 거쳐 이 약제가 이 질환에 쓰이게 되더라도, 모든 환자에게 통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렇게 ‘통제 불가능하고 치료 불가능한’ 유전자변이로 인한 질환이 있는 상황에서, 희귀질환관리법에서 목표하는 바는 이미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 아이 같은 사람들의 삶을 배제하거나 비판하는 것처럼 들린다.


희소질환의 ‘예방, 치료, 관리’보다 더 절실한 것


이처럼, 예방도, 치료도 불가능하고 그저 더 악화되지 않도록 ‘관리’라도 되면 다행인 삶이 여기 있다. 이제 만 8세밖에 안 되었지만 이미 악화의 조짐이 보이는 아이를 둔 사람으로서, 희귀질환관리법에 쓰인 ‘예방, 치료, 관리’라는 희망찬 세 단어는 모두 내 것이 아니다. 아이가 성인이 된 시점에는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생각해보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혹여 내 아이가 가진 질환에 대해 그런 게 가능해진다 하더라도, 이 단어들이 멀게만 느껴질 희소질환 당사자는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그런 희소질환 당사자와 그 가족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예방 불가능, 치료 불가능한’ 질환에 대한 국가의 인정, 의료진의 관심, 그리고 사회적 지지다. 자녀의 희소질환 앞에서 부모가 그것을 ‘예방’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하지 않도록 국가가 나서서 변호해도 모자라는 형편에 희귀질환을 예방하자고, 예방할 방법을 찾자고 말하는 것은 이미 예방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희소질환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희소질환 당사자와 그 가족에게 엄청난 폭력으로 다가온다. 또, 치료 불가능한 희소질환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건 당장의 증상으로 인한 생활의 불편을 들어주고 그 불편을 해소할 방법을 함께 찾아줄 의료-보건 전문가이지, 언제 나올지 모를 ‘치료법’에 매달리게 하는 희망고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엔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모습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옹호해줄 대중적 캠페인과 교육이 절실하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차라리 다행인 날들을 지나고 있는 지금, 코로나19 이후 다시 시작될 날들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하고,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 이 글은 <비마이너>에 실렸습니다.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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