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던 날.
우리 집에선 내 아버지가, 그리고 그의 집에선 그의 첫째 누나와 매형이 배웅을 나왔다. 그날 인천공항에서 마지막 점심을 먹으며, 서운함에 목이 메이는 아버지를 못본 척 했던 기억이 난다. 아름답지도 화목하지도 않았던 내 원가족을 떠나 나만의 새 가족을 만들겠다고 떠나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후련했고, 조금 더 모질었다.
그렇게 떠나 새로이 정착한 곳에서 나는 어느새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로부터 한동안, 나의 부모는 엄마가 된 나의 모습도, 내 아이의 얼굴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주변의 유학생 가정을 둘러보면 너나할 것 없이 친정에서, 시가에서 번갈아 방문을 해 아이를 보고, 여행도 하다 가곤 했는데 우리는 8년을 체류하는 내내 양가 어디에서도 누구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여름마다 겨울마다 누구네 집에 부모님이 오셨다, 누구네 집은 그래서 여행을 갔다, 하는 얘기가 들리면 가끔 서러웠지만, 사실 속마음은 편했다. '없는 집안' 자식들끼리 만나 맨몸으로 떠난 우리가 부모에게 아픈 손가락이었듯, 우리가 낳은 자식은 다른 이유로 우리에게 아픈 손가락이었으므로.
아이를 낳던 날, 소식을 기다렸을 한국의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가 여느 아이들과 조금 '다르다'고 이야기했을 때도, 그 후로 몇년 간 아이 사진을 찍을 때마다 블로그며 카톡으로 보냈을 때도, 나의 부모는 아이의 상태에 대해, 아이가 갖고 태어난 병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그 '말없음'이 때로는 무관심으로 비쳐져 못내 서운할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다행으로 여겼다. 걱정을 한다고 달라질 병도, 고쳐질 병도 아니니 그저 잘 크고 있겠거니, 잘 살고 있겠거니 해주는 편이 우리에게도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귀국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니 그것부터 겁이 났다. 과연 우리 두 사람의 원가족은 이 아이를 처음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2019년 6월.
8년만에 돌아온 인천공항엔 어깨가 굽은 예순의 아버지와 이가 빠진 예순의 엄마가 나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의 아이와 내 부모는 처음으로 서로를 만났다. 사진으로만 보던 서로를 실물로 마주한 순간, 세 사람은 어색한 몸짓, 어색한 말투로 서로를 불렀다. 초여름이었으므로 아이는 그간 하던대로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나의 부모는 굳이 아이의 다리에 시선을 두거나 그에 대해 말하려 하진 않았던 것 같다. 첫 비행이라 다리에 무리가 갈까봐 압박스타킹을 신겨 비행기에 올랐는데, 그걸 인천공항 도착할 때까지도 신고 있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이와 짧고 어색한 인사를 나눈 뒤, 나의 부모는 나를 향해 그저 '오느라 고생 많았다'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오랜 비행과 많은 짐가방에 지쳐버린,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을 당신들의 딸을 보며, 내 부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알 길은 없지만 지금도 궁금하다.
먼지 폴폴 날리는 아버지의 화물용 밴에 짐가방과 몸을 모두 싣고 인천공항을 빠져나가는 길. 돌아왔다는 실감과 함께 뜻모를 두려움이 밀려왔다. 나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이곳이, 내 아이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지 몰라 두려웠다. 이 아이를 낳고 단 한번도 두려워하거나 주저한 적 없었던 내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마다 쏙쏙 들어와 박히는 모국어 한마디 한마디가, 반갑기보단 두려웠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가 아직 한국말에 서툴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그로부터 얼마 후, 아이와 시어머니의 첫만남 자리에서 더욱 굳어지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