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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노바디가 아니었다

형제들과 함께 증명해 온 시간, 60년 세월이 남긴 가장 값진 유산

by 새나라의 어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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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변두리에서 보낸 유년 시절은 이제 아득한 풍경이 되었지만, 그 시절의 기억 한가운데에는 60년 세월에도 바래지 않는 감정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가족을 둘러쌌던 친척들을 향한 ‘열등감’이라는 깊은 그림자다.

오늘날 내가 이룬 소소한 성취를 굳이 SNS로 형제들에게 알리고 함께 기쁨을 나누려는 마음은 단순한 자랑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상처를 공유한 우리 형제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무언의 확인이며, ‘우리는 노바디가 아니었다’는 굳건한 연대의 표시다. 그 이면에는 수십 년 묵은 상처에 대한 공동의 항변이자, 함께 위축되었던 어린 시절의 우리 모두를 향한 뒤늦은 위로가 담겨 있다. 4남매와 부모님이 함께한 우리의 유년 시절, 아버지는 당신의 형제들을 위해 청춘과 결혼 생활의 많은 부분을 헌신했다. 두 번의 군입대와 유일한 정규직이라는 책임감으로, 정작 당신의 가정보다는 형제들을 위한 일방적인 지원을 감당해 왔다. 그 깊은 마음의 빚 때문이었을까, 명절에 형제들이 우리 집을 찾으면 아버지는 아내에 대한 배려 없이 감정을 터뜨리셨고, 취기는 억눌렀던 상실감을 날것 그대로 쏟아내는 통로가 되었다.

특히 명절이면 찾아오던 작은아버지 부부에 대한 기억은 날카로운 파편으로 남아있다. 아버지의 극진한 환대도 잠시, 술잔이 몇 순배 돌고 나면 자리는 감정의 전쟁터로 변했다. 아버지의 절제되지 못한 토로가 문제의 시작이었지만, 그 끝은 항상 작은아버지의 몫이었다. 그는 처가의 중요한 약속을 핑계로 서둘러 자리를 떴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의사 동서들을 만나야 한다는,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그의 계획을 들어야만 했다. 공기업 사장인 처삼촌 같은 존재들과 함께 언급되는 그들의 화려한 세계는 우리 가족을 순식간에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썸바디(somebody)’였고, 내세울 것 없는 우리는 ‘노바디(nobody)’임을 확인받는 그 순간들은 존재를 규정하는 낙인처럼 느껴졌다.

열등감의 근원은 외가라고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의 유일한 교제 상대였던 십여 살 터울의 이모 댁은 늘 경제적으로 안정되었고, 사촌들은 좋은 대학에 진학하며 탄탄한 미래를 약속받은 듯 보였다. 그들의 평온함은 우리 가족의 상대적 박탈감을 깊게 했고, 은연중에 배어 나오는 우월감 또한 느껴졌다. 특히 아버지의 취중 언행을 가감 없이 지켜본 외사촌 형 앞에서, 나와 내 형제들은 속수무책으로 또 다른 열등감에 빠져들어야 했다. 지금 돌아보면 어처구니없는 자기 비하였지만, 그때는 마음의 상처를 방어할 근육이 전혀 없던 연약한 시기였다.

그러나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고 때론 분노했던 그들의 삶에도 저마다의 아픔과 그늘이 있었음을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흔한 위로가 삶의 진실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어쩌면 우리는 허락도 받지 않은 열등감을 스스로 키우며, 존재하지 않는 적과 싸워왔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 기억은 더 이상 우리를 옭아매는 족쇄가 아니다. 오히려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섰기에, 삶의 진정한 가치가 외적인 성취가 아닌 내면의 단단함에 있음을 배웠다. 열등감이라는 그림자는 이제 우리 가족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보듬는 공감의 언어가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타인의 잣대로 서로를 재단하지 않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소박하지만 온전한 행복을 가꾸어 나간다.

이 글은 단지 한 개인의 회고를 넘어, 우리 가족이 함께 통과해 온 시간의 정직한 기록이다. 나는 우리의 자녀들이 이 이야기를 통해 이전 세대가 겪었던 시대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 상처 속에서 피어난 성장을 보며 삶의 수많은 비교와 좌절 앞에서 자신만의 중심을 지키는 지혜를 배우기를 기대한다. 과거의 그림자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기에, 우리는 열등감이라는 유산을 대물림하는 대신 그것을 극복해낸 용기와 서로를 향한 신뢰를 가장 값진 가족의 역사로 물려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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