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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과 산소의 '아름다운 이별'

석탄의 불 맛에서 수소의 물맛으로, 미래를 위한 위대한 식탁

by 새나라의 어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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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을 하나의 거대한 식당이라고 한다면, 지난 수천 년간 이 식당을 지탱해 온 주식(主食)은 단연 '철(Steel)' 일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철로 지은 집에서 잠들고, 철로 만든 이동수단에 몸을 싣습니다.

이 단단한 주식인 밥을 짓기 위해, 철강 기술자들은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거대한 부엌에서 뜨거운 불과 씨름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유서 깊은 부엌이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기후 위기라는 거대한 시대적 요구 앞에서 말이죠.


철의 숙명: "산소야, 제발 나를 놓아줘"

많은 분들이 '철' 하면 땅속에서 단단한 쇳덩어리를 뚝딱 캐내는 모습을 상상하시곤 합니다. 하지만 자연상태의 철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땅에서 갓 캐낸 철광석은 붉은 흙덩어리에 가깝죠. 왜 붉은색일까요? 바로 철(Fe)이 '산소(O)'라는 녀석과 아주 질기게 껴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존재상태에 따라 검붉은 색을 포함하는 다른 색의 철광석도 있지만 대세는 붉은색입니다.

철과 산소는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죽고 못 사는 사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필요한 건 '순수한 철'입니다. 그래서 제철(製鐵) 기술의 핵심은 아주 간단합니다.

"어떻게 하면 철에게서 산소를 떼어놓을 것인가?" 바로 이 '이별'의 과정입니다. 하지만 둘의 사랑이 워낙 깊어, 산소가 더 매력적인 존재로 보일 '유혹자(환원제)'가 필요했습니다.


지난 300년의 연인, '석탄'의 딜레마

지난 300년 동안 인류가 찾아낸 최고의 유혹자는 바로 '석탄'이었습니다.

거대한 용광로(고로)에 철광석과 석탄을 넣고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으면, 석탄은 산소를 아주 강력하게 유혹합니다. "산소야, 철보다는 내가 더 따뜻해. 나랑 가자!"

결국 산소는 철을 버리고 석탄과 결합해 밖으로 나옵니다. 이때 산소와 탄소가 만나서 생기는 흔적이 바로 이산화탄소(CO2)입니다. 즉, 이산화탄소는 단순한 매연이 아니라, 우리가 철을 얻기 위해 산소를 떼어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별의 흔적'인 셈입니다.

문제는 기존의 용광로 방식이 '값싼 공기'를 쓴다는 점입니다. 공기 중에는 산소 말고도 질소가 가득합니다. 이질소들이 섞여 들어가니, 굴뚝으로 나오는 가스는 온갖 기체가 뒤섞인 짬뽕 국물 같아집니다. 여기서 이산화탄소만 쏙 골라내기 란, 믹스커피에서 설탕만 빼내는 것처럼 어렵고 비싼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한국의 지혜: 섞이지 않게, 깨끗하게 (파이넥스)

모두가 "어쩔 수 없다"라며 옛 방식에 머물러 있을 때, 대한민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파이넥스(FINEX)'라는 독자적인 요리법을 개발해 운용해 왔습니다.

이 기술이 왜 중요한 '징검다리'일까요? 가장 큰 차이는 불순물이 섞인 공기 대신, '순수한 산소(Oxygen)'를 쓴다는 점입니다.

순산소를 사용하면 굴뚝으로 나오는 가스의 성분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잡다한 질소가 사라지고, 고농도의 이산화탄소와 재사용 가능한 가스들만 깔끔하게 모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지구를 덥게 하는 이산화탄소를 콕 집어내 따로 저장하거나(CCS), 다시 자원으로 활용하기가 놀라울 정도로 쉬워진다는 뜻이죠.

또한 이 기술은 편식하지 않습니다. 석탄뿐만 아니라 덜 매캐한 천연가스도, 깨끗한 전기도 유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겉보기엔 같은 석탄 요리 같지만, 그 안에는 이미 탄소를 통제할 수 있는 미래의 지혜가 숨 쉬고 있습니다.


미래의 연인 '수소', 그리고 춤추는 가루

이제 우리는 더 완벽한 이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석탄 대신 '수소'라는 새로운 유혹자를 데려오는 것입니다.

원리는 똑같습니다. 수소가 산소를 꼬셔냅니다. "산소야, 나랑 가면 물이 될 수 있어." 수소(H2)가 산소(O2)와 만나면 '물(H2O)'이 됩니다. 검은 연기 대신 맑은 수증기만 나오는 꿈의 기술, 바로 수소환원제철입니다.

여기서 한국 기술의 진가가 다시 한번 발휘됩니다. 유럽의 셰프들은 가루 상태의 철광석을 쓰기 힘들어 동그란 경단(펠렛)으로 뭉쳐서 요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파이넥스를 통해 이미 '가루를 춤추게 하는 법(유동환원)'을 터득했습니다.

가루 상태 그대로 공중에 띄워 유동(流動)시키는 이 기술은, 훗날 연료가 '수소'로 100% 바뀌었을 때도 그대로 적용될 핵심 노하우입니다. 남들이 이제 막 걸음마를 뗄 때, 우리는 이미 달릴 준비를 마친 셈입니다.


기다림의 미학, 위대한 식탁을 위하여

물론 하루아침에 모든 석탄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밥을 지을 때 뜸 들이는 시간이 필요하듯, 거대한 산업의 전환에는 기술이 무르익을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순산소를 사용해 탄소를 통제할 수 있는 '파이넥스'라는 징검다리가 있고, 가루를 춤추게 하여 수소 시대를 선도할 ‘한국형 수소환원제철기술'이라는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건너야 할 저 편의 땅으로 넘어가기에는 이 다리를 좀 더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K- '로 표현되는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은 계속 흐름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그 이면 깊숙이는 자신의 것에 대한 이해와 자부심이라는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해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 있게 펼쳐 보일 때 세계인의 마음을 공명 시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기술로 기후 위기라는 난제를 해결하고, 세계 철강 산업의 새로운 표준이 될 우리의 미래. 저는 뜨거운 용광로 곁을 지키는 한 명의 기술자로서 확신합니다. 머지않아 전 세계가 한국의 '고유하고 깨끗한 철'을 보며 감탄할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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