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다는 걸 모르게 해 주소서
첫눈이 내리거나, 밤하늘에
달이 너무 예쁘거나 할 때,
꼭 마치 소원을 빌어야 할 것만 같다.
근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남들이 다할 것 같은
기본적인 소원들만 조용히 말해본다.
이랬던 내가, 2021년 새해를 맞으며,
드디어 나만의 구체적인 소원이 생겼다.
죽는다는 공포를 느끼지 않게
가볍게 가게 해주옵소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빌 설리번은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에서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종교적 개념이 더 오래 지속되는 이유는 우리 뇌가, 예를 들어 우리가 죽을 때 일어나는 일 같은 불확실성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뇌가 죽음이라는 마지막 커튼콜을 생각한다면 어느 프리마돈나 뇌라도 미쳐버릴 수밖에 없다.
나 없이도 세상이 계속 돌아간다고? 그럴 리가! 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데! 난 영원히 살 거야!
영혼이 육체의 소멸에도 살아남으리라는 생각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우리의 존재가 레이더 위에 찍혔다 사라지는 점 하나에 불과할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다른 것에 정신을 팔게 해 준다. 종교는 프리마돈나의 정신을 위한 치킨수프인 셈이다. 뇌의 에너지를 절약해주고 뇌를 자유롭게 해 준다. 그래서 생존과 번식이라는 일차적 임무와 관련이 깊은 당면한 문제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P334~336
(위에 글은 올해 초에 쓴 글이다. 엄청 우울했던 시기여서 이런 글을 썼던 것 같은데,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여태껏 서랍장에 두고 있었다. 버리기는 아까워서 지금 글을 마저 완성하기로 함.)
나이가 들면 살만큼 살았으니까 죽음에 대해 의연해질 줄 알았다. 나이가 들어보니 딱 그 반대였다. 왠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죽기 싫은 것 같다. 죽을까 봐 무섭다. 죽는 게 무서워진다. 왜 이럴까.
다들 100세 시대라고 하니까 나도 그 정도는 살겠지 하고 안심했었다. 의학이 발전하긴 했네, 백 년을 살다니 하며 신기해했었다. 그러다가 대학병원에서 간병생활을 해본 이후로 오래 산다는 것에 대한 환상이 깨져버렸다.
병원에는 늙고 아픈 사람이 많다. 행동거지가 불편해서 간호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몸에는 주렁주렁 생명유지 줄을 달고 있어야 한다.
그때야 알았다. 인간은 예전보다 오래 살 수 있는 건 맞는데, 건강하게 제대로 사는 건 아녔구나. 마지막까지 존엄을 지키며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병원은 나에게 너무나 잔인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의식이 흐릿하면,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면, 그때면 죽는 게 두렵지 않을 수도 있을까?
죽음을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두렵고 너무 걱정된다. 사람들이 왜 종교에 빠지는지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이런 물음들을 많이 본다. 삶이 끝날 때 무슨 생각할 것 같아요?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어요? 어떤 일들이 후회될 것 같아요?
무슨 생각을 하긴.. 그냥 죽는 순간까지 내가 죽는다는 걸 모르고 훌쩍 떠났으면 좋겠다. 이게 제일 좋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