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아직은, 순수의 시대
이제야 밝히지만, 나는 미술을 전공했다. 물론, 지금 직업으로 택한 일은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지만 말이다. 부모님이 지나가는 말처럼 전공에 대한 얘기를 하실 때면, 나는 어쩐지 죄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대학 4년의 시간과 등록금, 게다가 미술을 했으니 고등학생 시절부터 들었던 어마 무시한 학원비.
미술을 아예 안 하는 것이 아니야, 무조건 다시 할 거야.
스스로도 다짐하고는 했다. 그러면서 자기 위안을 삼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왜, 나는, 재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할까,
하는 죄책감. 답답함.
사람은, 자기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절대로 남의 말에 따라서는 안된다. 심지어 그것이 부모님일지라도. 결국은 내가 사는 인생이기 때문에 남의 판단으로 결정하게 되면, 반드시 나중에 그 사람을 원망하게 된다. 그것 역시 내가 한 결정이지만 말이다.
나는 순수미술을 했어야 했다. 그게 내 성향과도 잘 맞았다. 그것을 아주 뒤늦게 깨달았다. 대학 재수를 하기 싫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전공을 선택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냥 취업이 잘 되는 디자인을 선택했다. 디자인 중에서도 의상을 전공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나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순간이고 모든 것이 꼬여버리게 된 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디자인은 내가 잘하고 싶은 것이었고, 내가 잘하는 것은 회화 쪽이었다. 후회한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친구들과 미술학원에서 밤늦도록 그림을 그렸던 때가 너무 그립다. 정말 순수하게, 너무나 순수하게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다. 조금 더 실력을 올리고 싶었다.
대학을 잘 가기 위해서, 같은 계산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정말,
내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였다. 수업시간이 끝나도 아쉬운 마음이 들어 선생님께 질문을 하고, 그림을 고치고, 마음에 들지 않아 또 좌절하고 고민했던 시간들.
그림 그리는 것이 재미있어서. 단순히 그 이유 때문에.
지금도, 미술학원을 같이 다녔던 친구와 그 시절이 그립다는 얘기를 한다. 지금은 그런 마음을 갖기 힘들고, 그런 마음으로 그림을 그릴 수도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서글프다. 반짝거렸던 그 마음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 오롯이 순수한 마음으로 뭔가를 하기엔 너무 걸리는 것이 많은 시기가 되어 버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