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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햇살 Aug 24. 2022

[그림책으로 글쓰기] 바뀌면 보이는 세상

관점의 방향을 만드는 사고와 환경

 

<하나라도 백 개인 사과> 이노우에 마사지 글, 그림/문학동네(2001)

<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 우르슐라 팔루신스카 글, 그림/비룡소(2018)



아는 만큼 보인다
유유상종
      초록은 동색     


위의 말들은 모두 생각이나 행동이 정해진 범위 안에서 정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람들은 상대방을 보는 자신만의 기준을 정하고 내가 정한 선을 넘지 않는 사람들만을 가까이에 두게 된다. 그렇게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정보와 감정을 공유하며 자신의 성향은 점점 더 고착화된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이 세지는 것도 개인이 가진 주관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 강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사물을 볼 때도 내가 생각하는 만큼의 모습만 보인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과 공학을 전공한 사람이 동일한 사물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은 다르다. 화제가 됐던 ‘유 퀴즈 온 더 블록’의 “눈이 녹으면 어떻게 될까요?”라는 질문에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 다른 대답을 하는 이유도 모두 다른 관점을 갖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자신이 가진 고정관념을 탈피하고자 독서를 통해 생각을 넓히고, 일상을 벗어난 여행을 기점으로 한 사고의 전환을 꿈꾼다. 하지만 관점의 범주를 넓히는 건 쉽지 않다. 여기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정해지고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두 권의 그림책이 있다.       


내가 가진 경험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 <하나라도 백 개인 사과>


<하나라도 백 개인 사과> 내가 가진 고정관념에 따라 사물을 바라볼 때 어떤 판단을 하게 하는지 보여준다. 동네 과일 가게 앞에 놓여 있는 사과 한 개를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직업을 기준으로 다양한 생각을 한다. 농부는 사과의 성장을 살피고, 화가는 사과의 색깔을 살핀다. 의사는 사과를 먹어 얻을 수 있는 건강의 유용함을 생각하고 목수에게는 사과보다 무너진 가게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은 사과를 보며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지만 사과의 본질은 변함이 없다. 누가 사과를 보느냐에 따라 사과의 가치는 천차만별이다. 책은 사람들이 동일한 대상을 자신의 입장에 맞게 바라본다는 점과 주변의 시선이 어떻든 대상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두 가지 메시지를 전달한다.


일상 속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축적해온 자신만의 고유한 사고를 기준 삼아 크고 작은 일을 결정한다. 큰 결정을 내리는 일부터 생활 속 사소한 습관까지 모든 사람은 다른 기준으로 판단하기 마련이다. 나와 배우자의 성장 환경 중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외식의 빈도다. 나는 거의 외식을 하지 않는 집에서 자랐고 배우자는 주말 외식이 일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중국음식을 먹어봤자 식사류 혹은 큰맘 먹고 시켜봤자 탕수육 정도만 먹었던 나와 달리 남편은 오향장육, 누룽지탕, 팔보채 등 다양한 요리를 먹으며 자랐다. 연애 기간 함께 중국 음식을 먹으며 나는 평생 먹어본 적 없던 다양한 메뉴를 맛보게 됐다. ‘중국음식’이라고 말했을 때 생각하는 사고의 범위는 어릴 적 경험을 통해 다르게 형성됐을 것이다. 변화를 겪고 새로운 음식에 대한 경험을 했지만 나는 여전히 끽해야 탕수육이 전부다. 새로운 경험이 나의 사고를 변화시키진 않았다.     


환경이 바뀔 때 보이는 것 <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


그간 쌓아온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그렇게 정해진 기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을 백 번의 경험보다 쉽게 바꾸는 조건이 있다. 바로 환경의 변화다. <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은 바쁜 일상을 벗어나 사람들이 여유를 찾았을 때 어떤 모습을 보게 되는지 그리고 있다. 신문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여유를 즐기는 삼촌에겐 눈을 뜨면 얼굴을 가리고 있는 신문의 활자들이 보이고, 튜브에 앉아 둥둥 뜬 채 수영을 즐기는 이웃집 아저씨에겐 파란 하늘이 보인다. 바쁜 생활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조용한 풍경들이 책 속 인물들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바쁨’이라는 조건이 배제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을 <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은 다양한 시선의 전환을 통해 보여준다.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하고 한창 매일 산책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평생 알지 못했던 수많은 들꽃들의 이름을 그때 나는 알게 됐다. 혼자 길을 걸을 때는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에 집중하거나 길을 지나가며 보이는 사람들의 옷차림새에 집중했다. 하지만 아이와 아파트 단지 혹은 공원을 걸으면서 마치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딘 것 마냥 다양한 풀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꽃은 항상 계절의 변화에 따라 피고 졌을 텐데 시간적 여유와 아이의 시선이라는 조건이 더해지자 비로소 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꽃이 보일 때마다 나는 스마트 렌즈 검색을 해서 이름을 외우려고 노력했다. 어렵게 만나게 된 꽃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아이에게 이름 모를 풀들을 일상 속에 각인시켜주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그 어떤 책을 읽고 여행을 가더라도 보이지 않았을 바닥에 붙어 피는 작은 꽃들은 부모가 되자 보였다. 마치 게을러야 보이는 세상이 있는 것처럼 내게 주어지는 조건이 변할 때 보이는 주변의 것들이 있다. 아이와의 산책이 드물어지자 신기하게 다시 꽃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세상을 살며 나와 너무 다른 사람을 만나 느끼는 당황감은 달갑지 않다. 특히 회사와 같은 원치 않는 단체 생활에서 만난 나와 다른 사람은 피하고 싶기까지 하다.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 있을 수 있냐는 의문과 함께 내가 너무 곱게 컸나라는 자책까지 하기도 한다. <하나라도 백 개인 사과>처럼 다양한 시선을 이해하고 <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 속 한가로운 시선을 보고 나니 주변을 보는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내게 보이는 것들이 전부가 아님을 때론 경계하고 나에게 주어진 환경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사고를 찾아보는 것은 나를 넓히는 재밌는 활동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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