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아직 밤의 끄트머리에 붙들려 있었다. 곁눈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5:45분이다. 가스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바닥에 앉아 휴대폰을 연다. 잠시 후 주전자가 부르르 소리를 내며 물이 끓기 시작한다. 끓는 물에 밀려 주전자 뚜껑이 미세하게 떨고 있다. 라디오에서는 이름 모를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었다. 느리게 흘러가는 왼손과, 그 위를 맴도는 멜로디가 공간을 채워나간다. 나는 창문을 반쯤 열어 두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공기 한 모금을 들이마신다. 공기 속에 가벼운 먼지 냄새가 섞여 있었다.
가족과 함께 산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소리를 듣는 일이다. 물 끓는 소리, 문 여닫는 소리, 누군가의 하품 소리로 시작되는 아침은 씻겨지지 않는 웃음소리, 목청을 키워 다투는 소리, 무거운 침묵의 소리가 되어 하루를 이어간다.
머리가 무겁고 가슴이 조인다. 손발이 아주 얇은 매듭에 묶인 듯하다. 풀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손을 대면 매듭은 더 단단해진다. 나는 일어서 주전자 뚜껑을 내려 잡고 가만히 눌렀다. 떨림이 멈췄다. 뚜껑을 놓자 다시 떨렸다. 그 단순한 움직임이 멈추질 않는다.
나는 외출하기로 한다.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거창하면 안 된다. 동네 슈퍼에서 건전지 두 개를 사 온다든가, 코인세탁소에서 수건 빨래를 한다든가 하는 정도가 적당해 보였다. 라디오를 끄고 주전자를 비운다. 하얀 스니커즈에 맨발을 구겨 넣고 현관문을 열자 계단에 쌓인 공기 냄새가 올라온다. 먼지 냄새다.
20분쯤 차를 달려 도착한 코인세탁소에는 초침이 달리지 않는 시계가 달려있다. 분침이 덜컹덜컹 거친 동작으로 시간을 채워나가는 것을 보며 차곡차곡 쌓이지 않아도 시간은 가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한다. 흰 수건 몇 장과 얇은 셔츠 하나를 드럼 세탁기에 넣는다. 세제를 투입하고 동전을 집어넣는다. 세탁기 이름이 ‘프리덤 3000’이다. 누구에게 자유를 준다는 건가. 천도 아니고, 이천도 아니고, 삼천이나 준다니. 참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드럼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젖은 천과 물과 비눗방울이 원을 그리며 돌았다. 나는 그 원이 어디에도 닿지 않는 띠처럼 보인다고 생각한다. 한쪽 면만 있는 곡면. 돌아도 돌아도 한쪽 세계만 돌게 되는 곡면이다.
창가에 앉아 잡지 한 권을 집는다. 빛바랜 잡지 앞에 유명한 피아니스트 사진이 있다. 안쪽으로 넘기자 모서리에 작은 고양이 그림이 그려져 있다. 누군가 심심해서 그려 넣은 것 같다. 고양이는 옆을 보고 있었고, 꼬리를 길게 말고 있었다. 나는 그 꼬리의 곡선이 드럼 세탁기의 궤도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 세탁기는 끝날 때 한 번 더 돌아요.” 창가 끝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말한다. 녹색 코트를 걸치고 있다. 봄도 가을도 아닌 오늘 같은 날에 입을 법한 얇은 코트였다.
“한 번 더요?”
“습관 같은 거죠. 다 끝났다고 소리가 나는데 실제로는 조금 더 돌아요. 마무리를 확인하는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나쁘지 않네요. 확인이라면.”
여자는 고개를 기울이며 웃는다. “확인이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요. 물이 다 빠진 건지 제대로 멈춰 서고 있는 건지. 정말 열어도 되는 건지. 뭐 그런 것들인데, 세탁기 몫인 거죠. 우리한테 자유 삼천 개를 주자니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거죠”
나는 그녀가 다시 잡지로 시선을 돌리는 걸 보고 세탁기로 눈길을 옮긴다. 드럼 안에서 수건이 매끈하게 돌아가고 있다. 사소한 물건들이 사소하지 않은 속도로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안심이 된다.
세탁기가 멈춘다. 끝을 알리는 멜로디와 함께 실제로 여자가 말한 것처럼 세탁기가 아주 조금 더 돌아간다. 나는 문을 열고 수건을 꺼낸다. 따뜻하다. 그 온기는 오래 지속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지만, 당장 손바닥에는 꽤 진하게 남는다. 나는 셔츠 주머니에서 낯선 동전 하나를 발견했다. 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난 동전. 우리 동네에서는 쓰지 않는 종류였다. 어디서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다 그 동전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빨래방을 나서니 햇빛이 골목의 먼지를 얕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슈퍼에서 AA 건전지 두 개를 사서 주머니에 넣었다. 돌아갈까 하다가 조금 더 걸어보기로 했다. 길 모퉁이를 한 번 돌아 나오니 ‘애프리콧’이라는 작은 바가 있다. 낮에는 문을 열지 않는 곳인데, 오늘은 반쯤 문이 열린 채였다. 안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피아노였다. 아까 라디오에서 듣던 곡과 닮은 소리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바텐더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내 얼굴을 한 번 훑어보고는 물컵을 내주었다.
“낮에는 메뉴가 많지 않습니다.”
“물만 마셔도 괜찮을까요?”
“물은 항상 괜찮죠.”
바는 조용했고, 피아노는 끝나는 듯하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차갑지 않았고, 목으로 부드럽게 내려갔다. 컵 바닥에 조그만 기포가 붙어 있다가 이따금 떨어졌다.
“세탁하는 날인가요?” 그가 물었다.
“그런 셈입니다.”
“그럼 오늘은 가벼워지는 날이네요.”
나는 웃었다. “가벼워지면 좋겠지만, 대체로 그런 날은 그렇지 않은 날이 되곤 하더라고요.”
그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짐은 주소가 있습니다. 주인이 아닌 사람이 오래 들고 다니면 무게가 균형을 잃죠. 손잡이도 손에 맞지 않고, 안에 든 내용물도 설명하기 어렵죠. 그럴 땐 반납소에 맡기는 게 좋아요.”
“반납소요?”
그는 바 뒤쪽, 빈 병을 쌓아둔 선반을 턱으로 가리켰다. “대체로 여기요. 아니면 빨래방. 또는 아주 오래된 공원 벤치. 반납소는 정식 간판을 달지 않아요. 대신 조용합니다. 조용한 곳은 대체로 반납소일 가능성이 높아요.”
나는 물컵을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아까 주운 동전을 꺼내 보여 주었다. “혹시 이게 뭔지 아세요?”
그는 동전을 받아 들고 한참 바라보았다. “구멍이 난 동전이군요. 구멍은 잊지 않겠다는 표식입니다. 손가락으로 끼워서 돌려 보면 알죠. 어디서든, 한 번 돌려 보면 그 소리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는 동전을 나에게 돌려주었다. 나는 동전을 손가락에 끼워 살짝 돌렸다. 작은 금속음이 났다. 나는 그 소리를 기억하기로 했다.
가게를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잠깐의 정적 후, 내 목소리와 아주 비슷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망은 때로 움직이지 않는 형태로 온다.”
“네?” 내가 물었다.
“움직이지 않고 머무르는 게 가장 멀리 가는 방법일 때가 있어요.” 목소리는 그 말을 남기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골목 끝에서 검은 고양이가 걸어 나와 나를 한 번 보고는 다른 골목으로 사라졌다. 꼬리가 길었다. 아까 잡지 속 그림과 닮았다.
나는 길을 되짚어 코인세탁소로 돌아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조용했다. 라디오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부엌 역시 조용했다. 주전자는 싱크대 옆에 엎어 둔 채였다. 나는 탈칵하고 라디오를 켰다. 여전히 피아노 연주가 흐르고 있다. 물을 끓였고, 뚜껑이 떨기 시작하자 손가락으로 살짝 위치를 바꿨다. 그것만으로 떨림이 줄었다. 아주 단순한 조정으로도 가능한 일들이 있다. 가능한 일부터 하는 것. 오늘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자신에게 말해 보기로 했다.
수건을 접어 서랍에 넣고 바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창턱에 올려 두었다. 햇빛이 금속 가장자리를 얇게 핥고 지나갔다. 나는 의자에 앉아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공기는 아침보다 차분해져 있었다.
저녁 무렵 가족이 하나둘 돌아왔다. 낮과는 다른 소리들이 집안에 들어왔다. 누군가는 오늘의 일을 털어놓았고, 누군가는 그냥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스파게티를 삶고 통조림 정어리를 열었다. 마늘과 올리브유를 팬에 볶아 소스를 만들었다. 부엌에는 다른 냄새가 생겨났다. 좋은 냄새였다. 식탁 위에 접시를 놓자 누군가가 와서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지만, 특별하지 않은 말들을 주고받았다. 그런 대화가 어떤 날에는 가장 필요하다.
식사가 끝나고 모두가 흩어진 뒤, 나는 다시 창문을 열었다. 창턱에 놓은 동전을 집어 손가락에 끼워 한 번 더 돌려 보았다. 아주 작은 금속음이 났다. 낮의 바가 떠올랐고, 반납소 이야기가 떠올랐다. 짐에는 주소가 있고, 반납소는 조용하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반납한 것들이 분명히 있었다. 내 몫이 아닌 것들, 설명할 수 없는 무게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내 손에서는 떨어져 나와 다른 곳에 앉았다. 그 사이에 내 손은 조금 가벼워졌다.
라디오는 아직 켜져 있었다. 피아노는 끝날 듯하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스위치를 끄지 않았다. 어떤 음악은 끝까지 듣지 않아도 괜찮다. 끝까지 듣지 않아도 내 안에서 계속되는 음악이 있으니까. 그 음악은 대체로 조용했고, 조용해서 반납소와 잘 어울렸다.
밤이 깊어지기 전에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이 어깨를 지나 등을 타고 흘렀다. 비누 거품이 하수구로 흘러들어 갔다. 눈을 감자 빨래방의 드럼이 떠올랐다. 돌아도 돌아도 같은 자리를 도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조금씩 다른 곳을 지나가는 운동. 나는 그 안에서 내가 서 있는 좌표를 아주 얇게 수정한다. 오늘은 그 정도의 수정으로 충분하다고 다시 생각했다.
불을 끄고 방에 누웠다. 집은 조금 조용해졌고, 바람은 커튼을 약하게 흔들었다. 묶여 있던 매듭은 여전히 매듭이었지만, 매듭의 모양이 달라져 있었다. 숨이 조금 깊어졌다. 언젠가 아침이 오면, 나는 커튼을 반쯤 열고 바람을 한 모금 들이킬 것이다. 바람 속에는 먼지가 아주 조금 섞여 있을 것이고, 주전자는 다시 떨릴 것이다. 그때 나는 뚜껑의 위치를 손끝으로 살짝 바꿔 줄 것이다. 그런 작은 조정이 반복되어 하나의 하루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처럼, 도망가지 않는 방식으로 조금 더 멀리 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