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항아리 속 붉은 여인

봉인의 뚜껑

by 저나뮤나

마린은 바람이 꺾이는 저녁 무렵 폐허의 강둑에서 항아리를 보았다.

항아리는 2/3 정도가 땅에 묻혀 있었는데 주변으로 모래가 흘러들어 가서

마치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키가 잔뜩 낮아진 모양으로 발견되었다.

마린은 단번에 이 항아리가 묻힌 것이 아니라,

숨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린은 손으로 위쪽의 흙을 털어냈다. 아직 채 땅 속에 숨지 못한 항아리의 뚜껑이 온전한 모양으로 드러났다. 나무로 만들어진 항아리 뚜껑 위로 벌어진 틈이 보였다.

뚜껑은 작은 금속 못들이 원형으로 박혀 있었는데 그중 몇 개는 뽑혀 나간 채 녹이 슬어 항아리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그녀는 뚜껑을 가만히 바라보다

손을 얹었다.

무언가 그녀의 심장 박동에 맞춰 내부에서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생명의 기척.

깨어나지 않은 느릿함.

숨을 멈춘 채 웅크린 떨림.


그날 밤 마린은 항아리 옆에 자리를 폈다.

불을 피우는 대신 그녀는 손을 뻗어 항아리를 감싸 안았다. 진동에 더해진 온기가 전해졌다.

규칙적인 진동과 따뜻함 속에 그녀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마린은 붉은 옷을 입은 여인과 함께다.

여인은 항아리 안에 있다.

눈을 감은 채, 그러나 분명히 살아 있다.

그 여인의 숨소리가 마린의 귀에 닿는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또렷하게 들숨과 날숨의 소리가 들린다.


"네가 왜 왔는지 안다, " 여인이 말한다.

"하지만 나는 깨어나서는 안 된다."

"왜요?"

"나는 기억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저주라 부르지..."




다음 날 아침, 마린은 항아리 위에 종이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우연히 떨어졌다고 하기에는 너무 반듯한 모양으로 상하좌우의 균형을 맞춰 놓여있었다.

고서의 조각이었다.

종이에는 아무 글씨도 없었지만, 마린은 그것을 '읽고' 있었다.

이름 하나가 그녀의 머릿속에 울렸다.


예루.


모르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이 항아리의 봉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항아리를 깨우려 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마린은 항아리를 메고 떠나기로 한다.

깨어나지 않은 여인이 숨 쉬고 있는 항아리를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린이 길을 떠나는 순간 그녀의 길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먼 숲 너머에서 깃털을 가진 두 자매가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언어를 소멸시킨 자들로 다만 날며, 움직이는 것들을 찾아낸다.


마린은 그들이 봉인을 지키려는 자들인지, 풀려는 자들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둘째는 붉게 잠든 자다. 항아리 속에 봉인된 기억은 깨어날 준비를 마쳤고,

그녀의 이름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 이름을 부르면, 기억은 현실을 대체하리라."

- 무언의 고서, 찢어진 두 번째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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