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월요일은 PD가 있는 날... 아무 생각 없이 출근했다 PD가 있다는 말에, 귀찮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또 늦게 끝나겠군....
3시 15분 PD가 있는 Marae, 마오리 회관에 도착... 오늘은 마오리 언어에 대한 PD... 강사의 마오리 왕과 중요 인물들의 설명을 잠깐 듣고... 회관 안팎에 세워져 있는 마오리 조각상들에 대한 설명과.... 몇 가지 마오리 언어를 배우는 활동까지... 끝으로 강사 본인에게 마오리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 외국인들이 마오리 말을 배우고 쓰는 것이 자신의 뿌리와 얼마나 크게 관련이 되고 중요한 일인지 가족사를 예를 들며 얘기한 뒤, 이 시간 이 순간에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가족 한 명에 대해 각자 얘기해보란다. 사적인 가족 얘기를 나눔으로 공동체 의식을 높이자는 취지랄까....
그렇게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적당히 불행하게 자랐다고 생각하는 나는 누구에 대해 얘기를 해야 하나 고민해 봤으나 딱히 엄마밖에 얘기할 사람이 없었다. 집이 가난해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던 엄마는 내 자식들만큼은 꼭 교육을 잘 시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밤낮을 열심히 일해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자식들 건사하고 학교 보내고.... 파탄이 났어도 진작 났을 가정을 혼자 끝까지 악착같이 지켜냈다. 그런데 난 그런 집안 환경이 싫어 어떻게든 집에서 벗어나려고 했고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결국은 이렇게나 먼 나라에 와서 정착하고 살고 있다. 복잡한 가정사에서 벗어난 건 내 입장에서 보면 잘 된 일이었고 엄마에게는 한없이 미안한 일이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오고 그냥 담담히 얘기하고 싶었는데... 엄마 얘기를 하며 울음이 터져 버렸다.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 '...... 왜 이러는 건지.... 당혹스러웠지만 나오는 눈물이 주체가 안되었다. 짜증 나고 당혹스럽고.... 민망하고.... 어린아이가 된 거 마냥 한없이 나 자신이 유치하고..... 난 왜 항상 이렇게 일관되게 쿨하지 못한 걸까... 그 순간 나 자신이 무지 원망스러웠다. 어린아이처럼 꺼이꺼이 하며 간단하게 몇 마디하고 끝낸뒤의 창피함과 당혹감은 온전히 나의 몫....
그냥 너무 무식하게 일만 하고 돈을 버는 게 본인의 운명, 책임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자식들을 건사하는 게 너무나 버거웠던 엄마... 그런데 난 그런 엄마를 버리고 내 살 길 찾겠다고 이 먼 타국에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그동안 멀다는 이유로 한국에 몇 번 가보지도 못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한국에 다녀오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 속마음은 가 봤자 편히 찾아갈 친정이라는 곳이 내겐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제 혼자 사는 엄마를 현실로 마주하고 버틸 자신이 없으니까... 나이가 들어 점점 정신건강이 흐려져..... 전화로든, 마주 앉아서든 옛날 얘기며, 이상한 얘기들을 끊임없이 하니까... 나 스스로 엄마를 마주하는 게 버거워서 선뜻 나서 지지가 않는 거였다.
그렇게 무던하게 여태까지, 엄마를 가슴속 깊은 곳에 꽁꽁 묻으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잘 살아왔는데... 이렇게 어이없게, 뜬금없이 엄마 얘기를 하며 울고 있는 나라니... 그것도 일터에서, 동료들 앞에서.... 참 어이가 없었다.
후회해 봤자 이미 일어난 일... 나 자신을 수없이 미워하고 자책해 봤자 바뀌는 건 없다.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지만 아니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동안 그 무거운 죄책감을 꾹꾹 누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살아왔지만, 속에서는 괜찮지가 안 않었나 보다....... 가끔씩 거울에서 중년이 된 나를 통해 옛날 중년 시절의 엄마 모습이 비칠 때마다, 보고 싶지 않지만 꼬부랑 할머니가 된 엄마의 사진을 가끔씩 볼 때마다, 피어오르는 연민과 슬픔을 꾹꾹 눌러 가라앉혔다. 같은 여자로서 그 힘들었던 삶에 위로가 돼 주지도, 힘도 돼주지 못했던 나, 그리고 지금도 멀찍이 떨어져서 남처럼 방관하고 있는 나.... 이런 내가 너무 이중인격적 이어서.... 그 상황에 눈물이 터진 게 더 어이가 없었고 용서가 안된다..... 하지만.... 그냥 중년의 아줌마가 되어보니 감정 조절이 잘 안 되어서...... 원래 나는 유치하고 감정적이고 쿨하지 못해서 평상시에도 툭하면 잘 우니까... 그냥 또 그랬나 보다고... 이러저러 이유를 가져다 붙이며 이번에도 스스로를 위로해 보려고 한다. 나약하고 이중인격적이고 인간적으로 많이 부족한 나지만... 그게 나인걸 어쩌겠나.... 밉다고 스스로를 버리면, 내 정신건강에 심각한 영향이 있을 것 같다.... 다시 툴툴 털어버리고 일어나야겠다. 살다 보면 공공장소에서 울 수도 있지.... 인생은 원래 즐거울 때도 있지만 슬플 때도 많으니까..... 슬프고 힘들면 표현하는 게 나쁜 건 아니니까.... 나를 다시 다독이고 보듬으며 끌어안고 힘을 내야겠다. 옛날 중년의 엄마가 그랬듯이 나는 내일도 출근해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고, 내 자식들을 키워내야 하니까..... 죄책감은 뒤로 미루고 이렇게 또 하루를 보낸다. 내일은 좀 더 의연해지기로, 더 열심히 살기로 약속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