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남 7녀' 중 다섯째 딸이다. 바로 위 넷째 언니 이름이 '후남(後男)'이다. 외할머니와 부모님의 '득남'을 바라는 아주 간절한 마음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후남'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다섯째인 내가 '딸'로 태어났을 때 외할머니와 엄마는 정말 속상했고, 꺼칠꺼칠한 목욕 타올로 '어린 나의 얼굴과 몸'을 빡빡 밀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그렇게 아들이 태어날 줄 알았는데 '다섯째도, 여섯째도 딸'이었다.
엄마보다 더 아들을 바라시는 분이 '외할머니'셨다. 젊은 시절에 '아들'을 낳지 못하셨고, 그 탓으로 '혹독한 시집살이'를 하셨다. 눈치 보느라 산후조리를 잘못한 탓으로 몸에 이상이 왔고, 후유증으로 무릎이 성하지 않으셨다. 지팡이를 짚어야만 다니실 수 있는 몸으로 절에 가셔서 '100일 기도'를 하셨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던가!! 딸 여섯에 이어 일곱번째로 '아들'이 태어났다.
시골 윗마을 아랫마을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잔치'를 했다. 얼마나 행복하셨을까?
외할머니와 울 부모님은 아마도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셨던 순간이 아니셨을까?
그래도 외할머니와 부모님은 '남동생'이 있어서 '행복'하셨으리라. 남동생은 착했다. 부모님 말씀도 잘 들었고, 공부도 잘했다. 누나들 사이에서 혹시나 나약해질까봐 '오냐오냐' 하지 않고 농사일도 거들게 했다. 어려운 살림에도 '웅변학원, 미술학원'에 보냈고, 친구들과 축구도 하면서 밝게 잘 자라주었다. 공부를 워낙 잘해 도시로 나와 '외국어고등학교'를 갔다. 모든 인생이 쉽지 않다. 남동생도 고등학교를 가면서 순탄치 않은 길을 시작했고, 약간의 방황도 있었지만,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가고 직장을 가고 그렇게 남들이 가는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누구나 겪을 수 밖에 없는 외할머니와 이별 그리고 몇 년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우리도, 남동생도 모두 '시련'의 시간이었다. 남동생은 군대 막 제대 후 복학을 앞두고 있었고, 아직 학생이라 외할머니와 아버지에게 여행 한번 보내드리지 못하고 마음껏 효도하지 못한 '아쉬움'은 더 컸었다. 우리는 '엄마'에게 외할머니와 아버지에게 못다한 '효도'를 다하자고 다짐했다. '남동생은, 1남 7남매의 외동아들'로서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었다. 그리고 엄마는 남동생에게 많은 부분은 의지 했다.
모두 나름의 시집살이(?)를 한 언니들이다. 홀시어머니를 신혼때부터 모시고 살았고, 시누이가 아래층에 사는 언니도 있었다. '시'자라면 시금치도 멀리한다고 했던가!! 언니들은 엄마를 설득했다. 둘만 잘 살면 된다고!!
엄마는 술을 못 드신다. 아버지가 매일 술을 드셨기에 '술'이라면 진저리를 치신다. 그럼에도 '매일 술을 드셔야만 잠을 주무실수가 있어서 술을 드시고' 주무셨다. 딸들은 출가했고, 직장인들이라 '혼자 계신 엄마'의 상태가 위험했다. 매일밤, 쓰디쓴 술을 마시며 힘들어하던 어느날!! 아들에게 결국 결혼을 허락하셨다.
생각해보면, 홀시어머니 그리고, 일곱 시누이!! '여자'로서 결혼을 생각하기에 쉽지 않은 결혼이다. 딸을 둔 입장에서 생각하면 '오히려 결혼 반대'의 상황일 수 있다. 그럼에도, 남자 하나 달랑 믿고 결혼하는 '올케'가 대단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