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내 아이는 성인이 되려면 10년이나 남았습니다.
언어치료를 받기 전, 병원에서의 언어평가지와 의사 소견이 들어간 내용을 제출해야만 바우처 카드를 받을 수가 있다.
말도 잘 못하는 어린 아기가 평가가 가능할까 싶었지만, 그 또래에 맞는 수준으로 진행하는 듯하였다.
역시 예상대로 아이는 언어지연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고, 언어뿐만 아니라 또래에 비하여 인지도 좀 낮다는 교수님의 코멘트가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인지'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언어만 느린 것뿐이지, 말만 터지면 나머지는 일사천리로 해결되리라 강하게 믿었었다.
그리고 몇 년 시간이 흘러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아기 때 언어평가를 받았던 병원에서 웩슬러(지능) 검사를 받게 됐다.
그런데 그 결과를 가지고 교수님이 나에게 했던 말은 내 심장을 강하게 할퀴었다.
"선생님, 아이마다 성장속도가 다 다른데, 조금 늦어도 결국 성인이 되면 다 비슷하지 않나요? 사회생활을 하는데, 평균치 그 우리가 말하는 평균이요. 결국 평균에 다다르게 되잖아요?"
"성인이 되어도 보통 사람보다는 인지가 조금은 느릴 거예요.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지 잘 알지만... 성장할수록 좁혀지는 게 아니라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습니다."
방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지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아니, 왜 벌써부터 우리 아이의 미래를 예측하십니까? 이제 겨우 8살인 아이라고요!!
속으로 눈물을 꾹 한번 삼켰다.
내가 아이의 성장속도가 조금 더디다고, 수학이나 국어를 또래보다 못한다고, 크게 걱정하지 않은 이유는 다름 아닌 '나'한테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똑순이였던 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6살 유치원 시절 우리 집은 갑작스러운 이사를 했고 엄마는 한 달이면 졸업을 앞둔 유치원을 옮기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버스를 두 번이나 타고 가야 하는 유치원에 나를 한 달은 넘게 보내셨단다. 다행히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첫 번째 버스까지는 같이 타고 두 번째 버스에서는(80년대 당시 환승제도는 없었으므로;;) 어린 6살 아이를 올려 보내고 엄마는 인사를 했다. 기사 아저씨한테 어디에 세워주세요 라는 부탁과 함께!! 푸하하하!!
그런데 나는 당차게도 씩씩하게 유치원까지 무. 사. 히. 혼자 등원을 하게 된다.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집 근처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 버스를 타고 혼자서 유치원까지 등원하는 여섯 살이라니.
우스갯소리로 요즘 같은 시대면 엄마는 철컹철컹 아동방임죄로 경찰서 갔을 거야~~~
아이를 낳고 나서 그 에피소드를 꺼낼 때마다 난 웃으면서 말했지만, 엄마는 꽤나 미안해하셨다.
그 범상치 않는 똑순이는 초등학교에 올라가서 반에서 1,2등을 다투는 모범생이 되었다.
중학교에 올라가자마자 첫 모의고사. 나는 반에서 2등 전체학년에서는 12등이라는 쾌거를 기록했지만 그게 내 인생 마지막 최고의 성적이었다. 경쟁을 할수록 나보다 대단한 친구들은 차고 넘쳤다는 걸 깨달았다.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한 나는 한동안 패배감에 빠져나오지 못해 허우적거렸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중상위권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게 되었다.
잘하는 건 맞지만 '특출 나게'잘하지는 못했다. 스카이 갈 정도는 아니라는 거.
어렸을 적 영특하다는 거를 (나를 투영해서) 별로 신뢰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결국 사람은 다 비슷하다고요.. 지능이 높건 조금 평균보다 못 미치던.. 어른이 돼서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
아이가 성인이 되기까지 10년이라는 세월이 남아있다.
적어도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불편하지 않도록 나는 최선을 다해서 아이를 키울 것이다.
그 과정이 비록 가시밭길이겠지만. 또 여린 엄마의 가슴이 몇 번씩 무너지는 날들도 있겠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단정 짓고 포기하기엔 이르다.
선생님! 저 선생님이 말씀하신 제 아이 미래 바꿔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