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할 수 있었다면....

by 아마도난

몇 년 전에 본 인상적인 인도영화 ‘청원(請願)’.

인도영화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한 수작이다.


천재 마술사 이튼은 공연하다 줄에서 떨어져 전신이 마비되는 중상을 입고 14년간 병상에 누워있다. 손가락 하나 제 맘대로 움직일 수 없지만 정신은 온전한 이튼은 특유의 낙천적 성격과 그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는 소피아의 도움을 받아 라디오 DJ로 활동하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 주는 삶을 산다. 하지만 콧잔등을 맴돌며 귀찮게 하는 파리를 쫓을 수 없고, 가려운 곳을 긁을 수 없으며 침대 위 천장에서 얼굴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피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자기 모습에 절망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불행한 삶 대신 행복한 죽음을 택하기로 한 이튼은 안락사를 허락해달라고 청원하지만 번번이 기각당한다.
영화 '청원'



개구쟁이 소년이 있었다. 녀석의 행동 개구쟁이지만 책만 받아 들면 식음을 전폐하고 빠져들었다. 초등학생이던 녀석에게 중고등 학생이 된 우리 아이들이 읽은 아동도서 한 보따리를 선물로 준 적이 있었다. 그때 녀석은 뛸 듯이 좋아하며 그 자리에서 책 한 권을 펼치더니 다 본 책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달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능청에 적잖은 책을 선물로 사주기도 했다. 녀석은 평생 동안 우는 모습은 고사하고 찡그린 얼굴조차도 보여주지 않아 종종 '애늙은이'라는 소리도 듣곤 했다.




고등학생이 되던 해 이른 봄날, 녀석은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고통을 호소했다. 아이 엄마는 맹장염을 의심하고 가까운 병원에 데려갔다가 몇 일분의 복통약만 받아 들고 돌아왔다. 약을 다 먹어도 증상이 가라앉지 않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엄마는 녀석을 대학병원으로 데려갔다. 조직검사 결과를 보며 담당의사는 횡문근 육종암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근육을 따라 암세포가 발병하는 것으로 유아와 청소년에게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담당의사는 정밀검사 받아보라며 서울의 대형병원을 추천했다.


우려했던 대로 녀석에게 나타난 증상은 횡문근 육종암었다. 더욱이 발견이 늦어 전신으로 전이된 상태여서 치료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더 큰 문제는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은 희귀병이라는 점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아이 부모에게 절망적인 상황이 닥친 것이다.행히 병원의 주선으로 국가로부터 난치병 치료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병원에서도 치료비 일부를 담했. 치료과정도 혹독한 고통을 반했다. 주기적으로 한 달 동안 무균실에 들어가 전신의 혈액을 교체하고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만 했 것이다. 척 힘들었을 텐데 녀석은 무균실을 나올 때는 항상 웃음 띤 얼굴이었다. 그렇게 고통을 이겨냈지만 운명의 여신은 녀석의 편이 아니었다.


어느 날 녀석의 아빠에게서 시간이 되면 다녀가라는 연락이 왔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머릿속이 무척 복잡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표정으로 녀석을 대해야 할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지럽게 널려있는 복잡한 의료장비들이 보였다. 녀석은 방 한가운데 놓여 있는 침대에 누워 제 누이와 이야기하고 있다가 나를 보며 힘겹게 일어나 앉으려고 했다. 모두가 말리자 녀석은 도로 침대에 누우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오신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렇게 누워서 인사드립니다.”


찡그리기는커녕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인사하는 녀석의 모습에 내가 허둥대고 말았다. 눈물이 쏟아질까 봐 뒤돌아서기도 하고, 목이 멜까 봐 쉽게 말도 꺼내지 못했다. 감염 우려가 있다고 해서 손도 잡지 못했다. 체력이 소진돼서, 오래 얘기하기 어렵다고 해서 10여 분 만에 병실에서 나왔다. 병실 문을 닫으며 녀석을 향해 말했다.


"야, 임마! 벌떡 일어나야지. 내가 너랑 가려고 탕수육하고 짜장면 맛있게 하는 집 찾아놨으니 빨리 가봐야 하지 않겠어?"


녀석도 억지로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뒤 녀석은 영영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고등학생이 됐어도 학교에는 거의 가보지 못했던 녀석의 소원은 교실에서 친구들과 공부도 하고 장난도 치는 것이었다. 그 쉬운 일이 녀석게는 소원이었다. 영화 ‘청원’에서 마술사 이튼은 안락사가 받아들여져 웃으며 죽음을 맞이했다. 녀석에게도 선택권이 주어졌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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