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대향로, 숨겨진 비밀을 찾아

월간 수필문학 기획연재

by 아마도난

“동문 다리, 동문 다리! 동문 다리 내리실 분 없어요? 없으면 오라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논산에서 부여로 오는 버스에서 지금은 사라진 버스 차장이 외치던 소리다. 동문 다리는 사비성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나성의 동문이 있던 자리여서 불리게 된 지명이다. 그 근처에 다리도 있었던 모양이다. 동문 다리에서 내리면 바로 앞이 백제왕릉원이다. 사비 시대 백제의 임금과 귀족들이 묻힌 곳이다. 이곳에서 왕릉원 주차장 확장공사를 하다 우리나라 발굴사에 길이 남는 진귀한 유물이 발견됐다.


1993년 12월 12일 저녁 8시 30분경. 작업 인부들을 모두 귀가시키고 부여박물관 학예연구직원들만으로 발굴작업을 하여 1,330년 동안 잠자고 있던 백제의 정신을 홀연히 깨운 역사적 순간이다. “이미 인부들이 보았으니 보안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밤사이에 도굴 등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에 야간작업을 결정한 것입니다.” 당시 발굴을 지휘했던 신광섭 부여박물관장의 말이다.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슐레이만이 마지막 순간 인부들을 모두 휴가 보내고 중요 유물 발굴은 부부가 했다는 일화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이 그토록 노심초사하여 발굴한 유물은 높이 64센티, 지름 20센티, 무게 11.85 Kg에 이르는 대형 향로였다. 유물을 확인한 발굴단은 처음엔 “이거 박산로(博山爐, 중국 한나라 때 향로) 아니야?”하고 탄성을 질렀다고 한다. 우리나라 조각사에서 기념비적 걸작으로 꼽히는 국보 287호, 국립중앙박물관이 선정한 ‘우리 유물 100선’에 선정된 금동대향로가 비로소 사람들에게 본모습을 보인 것이다.

“지금까지 이웃 중국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발견된 향로의 높이는 보통 20센티 안팎인데 이 백제 향로는 그 3배가 되며 구성 요소, 갈무리하고 있는 사상이나 상징성은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특히 당대 동서 문명의 제반 요소들이 잘 어우르고 있는 점에서는 실로 독보적이다.”
- 동서교류사 연구가 정수일 교수




향로는 더운 날씨 때문에 생기는 사람의 체취나 냄새를 제거하기 위하여 인도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무제 때부터 크게 유행했는데 이때 유행한 향로가 박산향로다. 박산향로는 중국의 산악숭배, 불로장생, 신선 사상 등을 배경으로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산(三神山)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부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금동대향로에도 중첩된 산과 그 산골짜기에 뛰노는 동물 그리고 여러 형상의 인간 등 박산향로의 특징들이 모두 담겨 있다.


백제는 숫자 ‘5’를 성수(聖數)로 여겼다. 음양 5행에서 기인한 것으로 세상은 동서남북 4방과 중앙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개념이다. 백제인들은 세상의 중심에 있는 백제가 중화(中華)이고, 주변 국가들은 모두 오랑캐(夷)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구려, 신라, 왜는 물론 중국에서 귀화한 사람을 서부 후항(西部後巷)에 모여 살게 하고 부이(部夷)라고 불렀다. 서부 후항은 백제의 행정체계인 5부 5항 가운데 한 곳이다.


금동대향로에도 백제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5’를 상징하는 많은 장치가 있다. 향을 피웠을 때 연기가 나는 구멍이 5개씩 2열로 배치되어 있고, 5단의 박산(博山)과 5단의 연판(蓮瓣) 그리고 25마리의 동물 및 5가지의 악기를 표현해 놓은 것이다. 이 가운데 코끼리, 원숭이, 낙타 등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동물로 백제의 활발한 대외활동도 엿보게 한다.


금동대향로에 담긴 사상뿐만 아니라 조형미도 워낙 뛰어나 중국과 일본 학계에서는 중국 남조에서 수입해 온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런 주장은 부여 왕흥사지나 익산 미륵사지에서 정교한 사리기(捨離器)가 출토되면서 사그라들었다.




금동대향로는 중국과 아무 관련이 없을까? 이 대목에서 흥미 있는 상상을 해 보자. 중국 장쑤성의 창저우(常州) 박물관과 양저우(揚州) 박물관에는 금동대향로를 연상시키는 향로가 있다. 창저우는 양쯔강 남쪽에, 양저우는 양쯔강 북쪽에 있다. 고대사회에서 큰 강과 산맥은 교류를 단절시키는 장애물이었다. 그런 시대에 장강이라고도 불리는 양쯔강 양쪽에서 금동대향로와 흡사한 향로가 전해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로 구성된 24사에서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백제국이 진(東晉) 대로부터 시작하여 송, 제, 양대에 양쯔강 좌우를 차지하고 있었다." (북사 백제전)

"백제국이 양쯔강 좌안을 진(東晉)대로부터 시작하여 송, 제, 양대에 이르기까지 250년간 점령하고 있었고, 후위 때에는 중원을 차지하였다." (주서 백제전)

"백제의 강역은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른다." (구당서 백제전)


역사적 사실 여부는 전문가들의 연구에 맡기고 상상의 나래를 계속 펼쳐보자. 금동대향로에는 72개의 봉우리가 표현되어 있다. 양쯔강 남쪽에 있는 중국 황산에도 72봉이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금동대향로에 향을 피우면 5개씩 2열로 뚫려 있는 구멍에서 빠져나오는 연기가 마치 산봉우리에 안개 낀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한다. 황산에 안개가 낀 것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만약 백제가 양쯔강 양안을 지배했다면 백제 땅에 있던 황산을 모델로 금동대향로를 만들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조형미가 뛰어난 금동대향로를 흉내 낸 향로들도 많이 만들어졌겠지…. 양저우와 창저우 박물관의 유물들은 백제가 이 지역을 통치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는 소정방에게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 신라의 태종 무열왕에게는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이라는 직위를 주었다. 신구를 정벌하는 총사령관과 우이를 정벌하는 사령관이라는 뜻이다. 신구는 서왕모가 사는 곤륜산을 가리키는 말로 세계의 서쪽 끝을 의미하고, 우이는 해 뜨는 동쪽을 의미한다. 사비성을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한 백제인은 동쪽에 우이, 서쪽에 신구라는 지역을 둔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지명이지만 백제 시대에는 나당연합군 사령관들의 직책에 쓰일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이는 나성의 동문 밖이 확실한 듯한데 신구는 어디에 있었을까? 혹시 중국 땅에?


중화가 오랑캐인 나당연합군에게 무너지던 날, 세상의 중심인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 금동대향로를 급히 감춰두고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했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한 그곳. 1,30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백제 후손의 손길을 빌려 다시 빛을 보게 됐다. 그보다는 전성기를 누리던 백제의 영광을 대한민국에서 재연하려고 금동대향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김치와 한복을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중국. 양쯔강 양안에서 발견되는 유사품을 핑계로 금동대향로도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지 않을까? 중국이 억지를 부리면 우리도 큰소리로 외쳐보자. “백제로 가는 타임머신입니다. 내리실 분 없으면 오라 잇!”

(수필문학 2021. 1,2월 합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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