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장법사의 모델은 누구일까?

by 아마도난

『삼국지연의』, 『수호지』, 『금병매』와 더불어 중국 4대 기서(奇書)로 꼽히는 『서유기』. 명나라의 오승은이 7세기에 당나라의 현장법사(602년~664년)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인도에서 불경을 구해 돌아온 사실을 기반으로 쓴 전기소설(傳奇小說)이다. 현장법사는 당나라 장안을 출발하여 실크로드를 따라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17년 동안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불교 유적지 등 110여 개국을 걸어서 방문한 뒤 다시 장안으로 돌아와 12권짜리 『대당 서역기』를 완성했다. 오승은이 이를 토대로 『서유기』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화과산 수렴동에서 돌 원숭이로 태어난 손오공은 특유의 호기심과 지도력으로 원숭이의 왕, 미후왕(美猴王)이 된다. 손오공은 천계와 용궁 그리고 저승세계를 오가며 망나니짓을 하다 석가여래에게 붙잡혀 500년 동안 봉인당한다. 이때 손오공이 봉인된 곳이 석가여래의 손이 변해서 만들어진 산, 오행산이다. 500년 후 삼장법사의 제자가 된 손오공은 무사히 불경을 구한 후 투전승불(鬪戰勝佛, 싸움의 부처)이 된다.


화과산은 중국 장쑤성 롄윈강 인근에 있는 산으로 『서유기』에 묘사된 대로 ‘일 년 사계절 꽃이 피고 일 년 내내 과일이 가득한 곳’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석가여래에 의해 손오공이 봉인되었다는 오행산은 어디에 있을까? 베트남 중부지역의 다낭에서 남쪽으로 10여 Km 떨어진 곳에 올망졸망하게 모여있는 대리석 산 5개가 있다. 각각 화, 수, 목, 금, 토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이들을 묶어서 오행산이라고 부른다. 석가여래의 손이 변해서 만들어졌다는 『서유기』의 내용과 부합한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산인 수산(水山)에 천연 동굴인 현공(玄空) 굴이 있다. 그 안은 수백 명이 들어서도 될 만큼 넓고, 가장 높은 곳은 수십 미터나 될 정도로 아득하다. 바로 이곳에 손오공이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대강 둘러봐도 천방지축 손오공을 가둬두기에 충분할 만큼 그럴싸한 공간이다.

다낭 오행산의 현공굴 입구


이쯤에서 『서유기』의 저자 오승은에게 딴지를 걸어보자. 삼장법사의 모델이 된 현장법사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갔다. 손오공이 갇혀 있던 오행산에서 약 4,000Km, 일만 리나 떨어진 곳이다. 게다가 오승은은 『서유기』에서 삼장법사를 무능하고 늘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으로 그려 놓았다. 그런 삼장법사가 이토록 먼 곳까지 와서 손오공을 데리고 다시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돌아가 여행을 계속했을까? 그보다는 삼장법사가 인도에 갈 때는 오행산을 거쳐 가고 돌아올 때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난 것은 아닐까? 그러면 이야기의 아귀가 들어맞는데….


추측이 맞는다면 이에 적합한 인물이 있다. 현장법사보다 100년쯤 늦게 인도에 다녀온 신라의 혜초 스님(704년~787년)이다. 혜초 스님은 중국 광저우에서 출발해서 8년 동안 수마트라, 스리랑카, 인도 전역과 이란,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미르 고원 등을 거쳐 당나라 장안으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을 완성했다. 바닷길을 제외하면 현장법사의 구법 기행로와 상당 부분 겹친다. 바닷길로 인도에 간 혜초 스님은 베트남도 지났을 것이니 손오공과의 인연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 정도라면 삼장법사의 모델로 혜초 스님이 현장법사보다 더 그럴싸하지 않은가?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은 이탈리아 상인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이탈리아 선교사 오도릭의 『동방기행』, 모로코 여행가 이븐 바투타의 『이븐 바투타 여행기』와 함께 세계 4대 여행기로 꼽힐 정도로 내용도 흥미진진하다. 과연 오승은이 『서유기』를 구상하면서 이런 점을 놓쳤을까?

혜초스님의 구법기행로

삼장법사의 모델로 혜초 스님 못지않은 사람이 백제의 겸익(謙益) 대사다. 겸익 대사는 현장법사나 혜초 스님과는 달리 절박한 심정으로 인도로 향했다. 고구려 첩자였던 도림 스님이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해 중요 정보를 고구려로 빼돌렸고, 고구려군에 의해 왕이 참수당하면서 백제는 존망 위기에 처했다. 스님 때문에 나라가 망할 뻔했다는 사실에 백제 사람들은 불교에 등을 돌렸고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어렵게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 왕실은 백성들의 마음을 추스르는 구심점으로써 여전히 불교의 역할이 필요했다. 겸익 대사는 이런 시기에 구법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는 성왕 4년(서기 526년)에 중국에서 배를 타고 인도로 떠났다.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梵語)를 익히고 불경을 공부한 겸익 대사는 서기 531년에 인도 승려 배달다삼장 및 28명의 승려와 함께 불경을 가지고 귀국했다.


이 시기 백제의 대외활동을 짐작하게 하는 흥미로운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온다.

흠명천왕 4년(서기 543년, 성왕 20년), 백제 성명왕(성왕을 가리킴)이 부남(扶南)의 노예 2명과 부남의 물품을 바쳤다.


부남은 오늘날의 캄보디아를 가리킨다. 부남 바로 옆에 있던 나라가 참파이고 그 중심지가 다낭이나 오행산에서 멀지 않은 호이안이다. 백제가 부남이나 참파와 긴밀한 교류를 했고, 영향력도 행사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다. 그러니 겸익 대사가 인도로 가면서 이 지역을 지났을 개연성은 무척 높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그도 혜초 스님 못지않은 삼장법사의 모델이 아닐까?

호이안 인근의 미선(美山)유적지. 참파왕국의 수도였다

아쉽게도 겸익 대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은 물론, 번역한 자료도 전해오지 않는다. 겸익 대사에 대한 기록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없다. 이능화의 『조선불교 통사』에 수록된 「미륵 불광사 사적(彌勒佛光寺事蹟)」이 유일한 사료다. 한편, 겸익 대사는 부여군 임천면 성흥산의 대조사(大鳥寺) 창건 설화에도 이름을 남기고 있다.

겸익은 담욱, 혜인 등 뛰어난 승려 28명과 함께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의 번역사업을 시작하고 율(律)을 정비했다. 율은 작게는 승려 개인의 계율에서, 크게는 전체 승단의 질서를 잡는 틀이 되었으며 나아가 국가의 제도 정비를 측면에서 뒷받침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었다. 이에 따라 백제불교는 예의와 의식에 치중하는 계율 중심의 불교가 되었으며, 그 뒤 일본 율종의 토대가 되었다. 백제의 율이 완비되자, 후세 사람들은 겸익을 ‘백제 율종의 비조(鼻祖)’라고 불렀다.

역본을 완성한 얼마 후, 겸익은 꿈에서 관세음보살을 만났다. 손에 광명주를 들고 나타난 관세음보살은 “불경 번역이 무척 잘되었도다”라는 칭찬의 말을 하고는 커다란 새로 변하여 임천 가림성으로 날아갔다. 겸익의 꿈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성왕은 그 자리에 큰 절을 짓도록 했다. 성대한 준공 법회가 끝날 무렵, 황금빛의 큰 새가 나타나더니 서쪽을 향하여 날아갔다. 이 신비스러운 일로 절 이름을 대조사(大鳥寺)라 부르게 되었다.


대조사 석불


오승은은 『서유기』를 쓰면서 삼장법사의 모델로 누구를 연상했을까? 삼장(경장, 율장, 논장)에 두루 능해서 ‘삼장법사’라는 별칭을 얻은 현장법사일까? 오행산을 지났을 것으로 짐작되는 혜초 스님일까? 아니면 부남이나 참파와 교류가 있던 백제 사람으로 오행산을 지나 인도에 갔다가 귀국길에 인도의 배달다삼장법사를 대동한 겸익 대사일까? 모두 가능성 있는 사람들이니 천생 오행산 현공 굴에 가서 황금원숭이 손오공에게 물어봐야겠다. “누가 삼장법사였지? 그리고 대조사 준공 법회 후 서쪽으로 날아간 황금새는 네가 변신한 것이었어?”라고….

(월간 수필문학 2021.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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