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史料)와 사실(事實) 사이

by 아마도난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슬픔에 잠긴 모습을 묘사한 ‘피에타’. 원래는 이탈리아어로 ‘하느님 불쌍히 여기소서’를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피에타가 지닌 특유의 비장미 때문에 많은 예술가가 그림이나 조각으로 작품을 남겼다. 이 가운데 으뜸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소장된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 ‘피에타’가 아닐까? 사실적인 예수의 근육이나 성모 마리아가 입고 있는 옷 주름의 섬세함은 돌로 만든 조각 작품이 아니라 실물로 착각할 만큼 정교하다. 이런 걸작을 보려고 ‘피에타’ 앞에는 항상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 나처럼 키 작은 동양인은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건지기도 어렵다.



‘피에타’를 완성한 다음 미켈란젤로는 석재 판매상에게 “대리석 안을 들여다본 나는 어머니 무릎에 누운 예수의 형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형상이 숨어 있었기 때문에 그 대리석이 그토록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나는 단지 예수가 시키는 대로 불필요한 부분을 쪼아냈을 뿐이요.”라고 말했다. 미켈란젤로에게 조각은 대리석 안에 갇혀있는 인물을 해방하는 작업인 셈이다.




그의 능력이 우리나라 역사연구에도 적용되면 얼마나 좋을까? 1976년, 북한의 평안남도 덕흥리에서 세상을 놀라게 한 무덤이 발굴되었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신하인 유주자사(幽州刺史, 유주는 오늘날 북경 인근 지역) 진(鎭)의 무덤이다. 무덤에는 중국 북경과 화북 일대 13개 지역의 태수들이 유주자사 진에게 정무 보고를 하는 그림과 광개토대왕의 연호 및 각종 직책에 관한 글이 적혀 있다. 북한 학계는 진이 고구려인이고 유주자사도 실직(實職)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한국이나 중국, 일본 학계는 고구려가 유주를 지배하지 못했고, 진은 중국인 망명자이며 진이 칭한 유주자사는 그가 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해 오면서 자칭한 것, 즉 허봉(虛封)이라고 주장한다. 유주의 위치와 진의 국적에 대해 남북한 및 중국, 일본 사이에 첨예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어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현재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확실한 것은 광개토대왕 치세에 벌어진 일이라는 점이다.

13태수 내조도. 윗줄 오른쪽 끝은 남성 통역관(通事吏), 아랫줄 오른쪽 끝은 여성 통역관


광개토대왕은 우리나라의 불세출 영웅이 아니던가? 게다가 중국은 분열되어 있던 시기였으니 고구려가 유주, 즉 북경 인근까지 진출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마저 논쟁이 계속되고 있어 안타깝다. 합리적 추론도 중요하지만 애매할 때는 우리에게 유리한 해석을 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일본은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임나일본부’를 주장하고 있고, 터럭 같은 단서라도 있으면 자기 역사를 과장하는 나라들도 비일비재한데….




유주자사 진의 무덤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이니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치자. 백제 동성왕이 북위와 전쟁을 벌였다는 이야기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사서에서도 언급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쟁조차 없는 듯하다.

영명 2년(484년) 위로(魏虜)가 백제왕 모도(동성왕)를 크게 격파하였다.
『건강실록』

(동성왕 재위) 10년(488년) 위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에게 패하였다.
『자치통감』 영명 6년(488년) 12 월조

이 해에(490년) 위로(魏虜)가 또 기병 수십만 명을 보내 백제의 변경을 공격했다. 이에 모대(동성왕)는 장수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으로 하여금 위로 군사를 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남제서』 58권 「동남이 열전」 백제

서기 472년, 백제 개로왕은 북위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를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두 나라의 관계가 비교적 돈독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불과 10여 년 뒤에 북위는 백제를 공격했다. 왜 그랬을까?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을 함락당한 백제는 475년에 웅진으로 천도했다. 웅진 천도 후에도 문주왕과 삼근왕이 연달아 비명횡사하는 등 백제의 혼란은 계속된다. 혹시 북위는 백제의 혼란기를 노리고 공격해 온 것은 아닐까?


싸운 장소도 의문이다. 북위와 백제 사이에 서해가 있고, 고구려가 있다. 이처럼 국경을 맞대지 않은 백제에 북위는 어떻게 기병 수십만 명을 보낼 수 있었을까? 당시 고구려는 장수왕이 통치하는 강국이었으니 북위가 고구려를 지나 백제를 공격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북위의 수십만 기병이 서해를 건너 백제를 공격했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렇다면 백제와 북위가 싸운 곳은 어디였을까?


남제의 사서인 『남제서』 백제전에는 우리나라 사서에는 언급도 되지 않는 사법명, 해례곤, 찬수류 및 목간나 등의 이름이 나온다. 동성왕이 남제의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북위와의 전투에서 공로를 세운 사법명 등을 왕(王)이나 후(候)로 봉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외에 공이 있는 장수들을 광양 태수, 청하 태수, 성양 태수, 광릉 태수로 봉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광양은 베이징시 팡산구, 청하는 산둥성 랴오청시, 성양은 산둥성 르자오시 그리고 광릉은 장쑤성 양저우시의 옛 지명이다. 반면 백제 시대 우리나라에는 비슷한 지명조차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런 이유로 백제와 북위가 싸운 지역이 중국 산둥성 일대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더 나아가 『남제서』에 언급된 왕·후·태수·장군 등의 관직명을 근거로 백제가 해외 영토를 경영했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주류 사학계에서는 당시 중국 본토와 만주 상황으로 보아 요서 지역이나 산동 지방에 백제의 군현(郡縣)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적다고 보고 있다. 설사 존재했더라도 백제의 군사력으로는 북위의 침공을 막아내고 대승을 거두기는 힘들었을 거라고 주장한다. 『건강실록』이나 『남제서』에 언급된 위로(魏虜)는 ‘위나라 오랑캐’라는 의미가 아니고 위나라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오랑캐, 고구려라는 것이다. 즉, 동성왕이 물리친 것은 북위가 아니라 고구려라는 것이다. 백제가 남제의 용병으로 북위와의 전투에 참여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어떤 해석이든 중국 사서나 우리나라 『삼국사기』에서 언급한 ‘백제가 북위를 물리쳤다’라는 기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런 해석을 해야 하는 우리 현실이 참으로 슬프다.




대리석을 보기만 해도 그 안에 숨겨진 형상을 알아내고, 무시해도 될 만큼 사소한 단서만 있어도 걸작으로 완성하는 천재, 미켈란젤로. 정성을 다해 ‘피에타!’를 외치면 우리나라 역사학계에도 미켈란젤로 같은 뛰어난 인물이 나타나려나?


(월간 수필문학 2021.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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