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헤엄치는 것을 잊어 물속으로 가라앉고 날아가던 기러기는 날갯짓을 잊어 땅으로 떨어졌다. 환한 달은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고 꽃은 부끄러워 시들었다 (沈魚落雁 閉月羞花)’ 중국의 4대 미녀인 서시, 왕소군, 초선 그리고 양귀비를 표현한 고사다. 미인박명이라더니 안타깝게도 네 미인의 삶은 한결같이 비극적이었다. 그녀들의 미모가 뛰어나 슬픈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비극적인 삶이 그녀들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한 건지…. 이 가운데 흉노의 선우(單于, 중국의 황제에 해당)에게 조공으로 바쳐진 왕소군(王昭君)의 삶이 특히 흥미롭다.
한나라 원제의 후궁이었던 왕소군은 흉노의 침공을 막기 위해 호한야선우의 후궁으로 보내졌다. 그녀는 호한야선우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 뒤 호한야선우가 죽자 흉노의 풍습에 따라 왕위를 이은 아들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았다. 맏이마저 죽자 왕소군은 아우와 혼인하여 70세가 넘도록 흉노 땅에서 살았다. 당나라 시인 동방규는 소군원(昭君怨)이라는 시에서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라며 고향을 그리는 왕소군의 심경을 노래했다. 이백도 소군원(昭君怨)이라는 시에서 ‘오늘은 한나라의 후궁인데 내일 아침이면 오랑캐 땅의 첩이라네(今日韓宮人 明朝胡地妾)’라며 왕소군의 고달픈 삶을 안타까워했다.
유목민족인 흉노에는 수계혼인(收繼婚姻)이라 불리는 혼인 풍속이 있다. 아비가 죽으면 친모를 제외한 아비의 여자들을 맏아들이 데리고 살고, 형이 죽으면 아우가 그 여인들을 데리고 사는 제도다. 수계혼인은 부친이나 형이 죽은 다음 상속으로 인해 부족이 분열되거나, 부족한 물자가 분산되어 생존이 위협받지 않도록 가장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는 풍습이다. 왕소군은 수계혼인 풍습에 따라 평생을 산 것이다.
부여나 고구려의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도 수계혼인의 하나다. 고구려 9대 고국천왕이 죽자 왕후 우씨는 아우인 연우와 재혼하고 선왕의 뜻이라며 왕으로 삼는다. 그가 10대 산상왕이다. 우씨가 8대 신대왕의 계비였다는 주장도 있다. 신대왕이 죽은 후 아들인 고국천왕의 왕비로, 다시 산상왕의 왕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왕소군처럼 우씨도 3 부자와 혼인한 셈인데 왕소군은 한나라의 안전을 위해 그랬다지만 신대왕 3 부자와 혼인한 우씨는 무엇을 얻으려고 그랬을까?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 : 형이 죽은 뒤 동생이 형을 대신해 형수와 부부생활을 계속하는 혼인풍습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 뿌리를 둔 백제에는 어떤 형태로 수계혼인의 흔적이 남아있었을까?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 장수왕의 전면적인 공격에 직면하자 왜와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동생인 곤지를 파견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이 아우인 곤지를 왜(倭)에 사신으로 보낼 때, 곤지는 개로왕의 임신한 부인을 자신의 아내로 달라고 요청하였고, 개로왕은 도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즉시 백제로 보내라는 지시와 함께 곤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형이 죽은 뒤에 형수를 아내로 삼은 고구려의 형사취수제와는 차이가 있으나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죽었으니 비슷한 결과가 된 셈이다.
곤지를 주신으로 모신 아스카베신사
곤지에 대해 『송서(宋書)』에서는 정로장군 좌현왕(左賢王), 『일본서기』에서는 군군(軍君)이라고 부르고 있다. 백제 조정의 병권을 장악한 권력자였다는 뜻이다. 그런 곤지가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혹은 지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왜에 갔다는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반론 가운데에는 일본 열도에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는 게 목적이라든지, 혹은 왜에 정착한 백제계 도래인 사회를 관리하러 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목적이 무엇이었든 곤지는 일본 간사이 지방의 가와치(오늘날 오사카 동부)지역에 정착했다. 현재 오사카 남동부의 하비키노시에는 곤지를 모시는 아스카베 신사가 있다. 일본으로 건너간 곤지와 그 후손들이 오랫동안 세력을 형성하고 영향력을 행사한 곳임을 짐작하게 하는 신사다.
좌현왕(左賢王) : 흉노 24개 작위 가운데 우현왕과 함께 가장 높은 직위. 흉노의 황제인 선우를 보좌해 동쪽 지방을 다스렸다. 차기 선우로 중국의 황태자에 해당한다.
왜로 가는 도중, 개로왕의 부인에서 곤지의 아내가 된 여인은 지금의 후쿠오카현 북쪽에 있는 섬 가카라시마에서 아이를 출산했다. 섬에서 태어났다 하여 아이 이름을 사마(斯麻)로 지었는데 바로 무령왕이다. 설화로만 전해오던 무령왕의 탄생은 1971년에 발굴된 무령왕릉에서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고 새겨진 지석이 발견됨으로써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가카라시마 사람들은 동굴이 있는 해변을 ‘오비야우라(オビヤ浦, 허리띠를 풀고 아이를 낳은 포구)’라고 불렀다. 무령왕이 태어난 가카라시마 섬 동굴 입구에는 ‘백제 25대 무령왕 탄생지’라는 표지판도 세워져 있다고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가카라시마에서 태어난 무령왕이 24대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반해 『일본서기』는 무령왕이 곤지의 둘째 아들이고 동성왕의 동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 사서인 송서(宋書)에는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나와 있다. 또 다른 자료에서는 곤지의 아들이고 동성왕의 이모형(異母兄)이라는 주장도 있다. 남아있는 자료가 많지 않고, 그나마도 정확하지 않은 백제 기록의 슬픈 현실이 이 대목에서도 발견된다. 분명한 것은 꺼져가던 백제의 명운이 동성왕과 무령왕에 의해 되살아났다는 점이다.
백제에서, 개로왕에게 수계혼인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참수한 고구려군은 대후(大后, 왕비), 왕자 등도 모두 살해했다. 개로왕의 지시로 도성을 벗어나 있던 태자 문주와 왜로 떠난 곤지를 제외한 백제 왕실의 씨가 말라버린 것이다. 문주는 웅진으로 천도하여 나라의 명맥을 이었지만, 땅에 떨어진 왕권은 회복되지 못했다. 문주왕은 병관좌평 해구에게 시해됐고, 뒤를 이어 등극한 삼근왕도 좌평 진남 등에 의해 시해당한 것이다.
삼근왕의 뒤를 이어 동성왕이 등극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동성왕이 귀국할 때 츠쿠시국(지금의 후쿠오카)의 군사 500명이 호위했다고 한다.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가 혼란에 빠져있는 동안 곤지는 가와치에서 힘을 기른 것이다. 왕위에 오른 동성왕은 정복 군주의 위용을 보이며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회복했고, 전라도는 물론 제주(탐라)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하기도 했다. 안정되어 가던 백제는 웅진을 기반으로 한 신흥귀족 백가에 의해 동성왕이 시해되면서 또다시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이 난국을 수습한 사람이 무령왕이다. 개로왕이 임신한 부인을 곤지의 아내로 주면서 “아이가 태어나면 즉시 백제로 보내라.”라고 당부한지 39년 만에 무령왕이 백제로 돌아온 것이다. 무령왕은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고 나라를 안정시켰다. 어쩌면 곤지를 아버지라 부르며 자랐을 개로왕의 아들이 나라를 구한 것이다.
‘나 자신은 칸무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는 사실에 한국과 인연을 느낍니다.’ (아키토 일본 천황의 기자회견 중에서, 2001.12월)
일본에 그 흔적을 강하게 남긴 무령왕. 왕소군이 70살이 넘도록 호한야선우 3 부자와 살면서 흉노의 한나라 침략을 막았듯 무령왕도 환갑이 넘은 나이까지 나라를 다스리며 혼란을 극복하고 백제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수계혼인의 유산 덕택에 백제의 국운이 150년 연장됐다고 생각하면 무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