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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난 Apr 30. 2021

단 하나의 선택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자욱한 안개를 뚫고 사람들이 낡은 건물로 들어선다. 무리 중에는 10대 소녀도 있고, 20대 청년도 있다. 중년의 남성이나 여성은 물론 나이가 많이 든 남자와 여자도 있다. 입구에서 이름을 확인한 다음 상담 순서와 상담실을 배정받고 조용히 대기실에서 기다린다. 그들은 모두 어제 죽은 사람들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1998년에 제작한 영화 「원더풀 라이프」의 한 장면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단 한순간을 저승으로 가져갈 수 있다면 어떤 기억을 가져가고 싶은가’하는 설문조사를 하여 채택된 사연을 시나리오로 꾸미고, 사연의 주인공을 영화에 출연시켰다. 영화라는 형식을 빌린 다큐멘터리라고나 할까? 망자들은 상담원과 대화를 하면서 3일 동안 자기의 삶을 돌아보고 가장 소중한 기억 하나를 고른다. 이들이 선택한 기억들은 다시 3일 동안 상담원들에 의해 짧은 영화로 재현된다. 10대 소녀는 놀이공원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던 일을, 중년의 여성은 아이 낳은 경험을, 중년의 남자는 비행기를 처음 조종했던 때를 그리고 어느 할머니는 어린 시절 대나무 숲에서 그네 탔던 기억을 소중하게 떠올린다. 망자들은 7일이 지났을 때 선택한 추억을 가슴에 안고 저승으로 떠난다.


우리나라 민속에 지노귀굿(진오귀굿 혹은 지노귀새남굿이라고도 한다)이 있다. 망자(亡者)가 생전에 품은 한을 무당의 입을 통해 넋두리로 풀어내어 홀가분하게 저승으로 들게 하는 의식이다. 삶에 대한 미련을 모두 정리하고 단 하나의 행복한 추억만을 간직하고 저승으로 떠나게 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생각이 이것과 다를까?



세상사가 어찌 순조롭기만 하던가? 저승 가는 길에도 곡절이 있는 모양이다. 와타나베는 상담원 모치즈키가 자기의 아내인 교코가 죽는 날까지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약혼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치즈키가 약혼식 후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하는 바람에 교코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추억을 선택하지 못하던 와타나베는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정하고 모치즈키에게 편지를 남기며 저승으로 떠난다.


“당신은 내 아내 교코의 정혼자였죠. …(중략)… 질투를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저희 부부는 그런 감정을 극복할 만큼 긴 세월을 함께 보냈습니다. 아니, 이곳에 와서 그 사실을 깨달았기에 아내와의 추억을 선택할 수 있었겠죠. 저는 제 70년 인생을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이 얘기를 꼭 하고 싶었습니다.”


망자는 행복한 추억을 선택하지 못하면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고 상담원으로 남아야 한다. 모치즈키가 50년 동안 상담원으로 남아있던 이유이다. 그러다가 와타나베를 통해 교코가 자신과의 만남을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저승으로 떠날 결심을 한다. 모치즈키가 떠나려 하자 그를 연모하는 상담원 시오리가 상심에 빠진다.


“난 그때 행복한 추억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어. 그리고 50년이 지나서 내가 누군가의 행복이었단 걸 알았어. 정말 멋진 일이야. 시오리, 너한테도 그런 날이 올 거야.”

“난 선택 안 해. 선택하면 이곳에서의 일을 잊게 되잖아. 모치즈키씨를 내 안에 간직할 거야. 또다시 사람들한테 잊히는 게 두려워.”


모치즈키는 교코와의 추억이 아닌 시오리와 함께했던 순간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여 “시오리, 내가 결심하게 된 건 이곳에서 생활하며 여러 사람과 만나고 헤어졌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나는 절대로 이곳을 잊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저승으로 떠난다. 영화에서 별다른 존재감이 없던 시오리가 사실은 모치즈키의 소중한 추억 속에 남은, 가장 행복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모치즈키가 저승으로 떠나자 21살에 죽은 이세야가 그 역할을 맡는다. 그는 삶에서 어느 한순간만을 고르는 건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는 것이라며 선택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만약 저승으로 가져갈 단 하나의 행복한 기억을 골라야 한다면 나는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 혹시 모치즈키나 시오리처럼 혹은 이세야처럼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여운이 오래 남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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