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삶을 사는 젊은 여자 스텔라(파멜라 빌로레시 扮)와 슬럼프에 빠진 중년의 피아니스트 리처드(리처드 존슨 扮)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신파 영화가 있었다. 고등학생 때인지 대학생 때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그 어름에 상영된 영화 『라스트 콘서트(Last Concert)』다. 리처드는 손가락을 다쳐 병원을 찾았다가 진찰을 마치고 나간 스텔라의 아버지로 착각한 의사로부터 그녀가 백혈병으로 2~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병원을 나온 두 사람은 우연히 버스정류장에서 다시 만난다. 스텔라는 명랑하게 말을 건네지만 리처드는 퉁명스럽게 대한다. 시간이 가면서 스텔라의 티 없는 마음에 끌린 리처드는 조금씩 마음을 연다.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함께 살려고 했던 스텔라는 아버지가 행복한 가정을 새로 꾸린 것을 알고 말없이 돌아선다. 상심한 스텔라를 리처드가 위로하고, 리처드는 스텔라의 응원을 받으며 슬럼프를 벗어나 「스텔라에게 바치는 콘체르토(Adagio Concerto from last Concert)」를 완성한다. 그 곡이 초연되는 날 스텔라는 리처드가 잘 보이는 무대 뒤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숨을 거둔다.
당시 19살이던 파멜라 빌로레시가 주연을 맡았다. 또래여서 그랬을까? 그녀의 매력에 사정없이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를 만나는 것은 예사였고 일상생활 중에도 불쑥 나타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영화의 OST도 감미로웠다. 스텔라가 죽어가면서 눈물을 흘리며 들었던 「스텔라에게 바치는 콘체르토」도 매력적이었지만 영화의 주요 장면마다 흘러나오는 「생 미셸(St. Michel)」은 더욱 귀에 쟁쟁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빌로레시 얘기에 열을 올렸고, 영화 OST는 카세트테이프의 릴이 늘어져서 재생되지 않을 때까지 듣곤 했다. 나만 좋아한 게 아닌 모양이다. 뮤직비디오의 배경이 몽생미셸이어서 한국인 관광객을 태운 버스가 이곳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이 OST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 후로도 영화가 상영된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곳이 어디든 찾아갔고, TV에서 방영되면 만사를 제쳐두고 감상했다. 셀 수 없이 보고 또 봐도 영화는 감동적이었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여전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OST는 언제 들어도 감미로웠고, 빌로레시의 청순함은 내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녀를 파멜라로 불러야 한다고 우겼지만 나는 빌로레시를 고집했다. 그녀가 나에게만 차별화된 연인이 되어주기를 바라서 그랬던 것일까? 그 후에도 오랫동안 그녀는 내 마음속의 연인으로 남았다.
10여 년 만에 영화 『라스트 콘서트(Last Concert)』를 다시 감상했다. OST는 감미로운데 눈꺼풀은 한없이 무거워졌다. 100여 분의 시간이 지루하게 흘러갔다. 여전히 청순미를 발산하는 듯한 빌로레시도 더는 아무런 감동을 전해주지 못했다. 늘 눈시울을 붉히던 빌로레시의 죽어가는 모습도 그냥 무덤덤하게 넘어갔다. 이게 무슨 일이지? 혹시 지난 10년 동안 내 마음이 사막처럼 황폐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영화가 끝났다. 예전의 감동을 다시 느껴보려던 기대도 더불어 끝났다. 감미로운 음악은 남았는데 청순한 빌로레시는 사라져 버렸다. 눈물샘을 자극하던 줄거리도 산산이 흩어졌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주는 비장함에도 내 입에서 ‘이게 마지막 감상인가 보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런데…. 진짜 마지막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