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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난 Dec 23. 2019

오래된 꿈

슐리만을 소환하다

 부여.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비운의 도시. 한 나라의 수도였지만 눈에 보이는  유적이 거의 없는 부여에서 초등학교를 다니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 매주 월요일,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조회를 할 때마다 교장선생님은 "여러분은 찬란한 백제문화의 정기를 받은 학생이다. 여러분 중에는 우리나라를 빛내게 할 될 사람이 있다...."는 훈화를 빼놓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혹시 내가 바로 그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상상도 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기대는 사라 대신 의문만  남았다. "부여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문화유적이 없는데 무엇을 보고 '찬란한 백제문화'라는 말을 쓸까? 그리고 어디에서 정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부여에 남아있는 유일한 백제시대 유적지인 정림사지는 잔디가 깔린 보기 드문 축구장(?)으로 우리의 놀이터였다. 곳에 누군가가 고무공 하나를 들고 나타나면 2,30명이 우르르 몰려 축구를 같이 했다. 이 나서 축구에 몰두하다 보면 정림사지를 관리하는 분이  "이놈들!" 하는 고함과 함께 갑자기 나타나곤 했다. 그럴 때 우리는 송사리 떼 달아나듯 사방으로 달아나 골목에 머리만 빼꼼히 내밀고 있다가 그가 사라지면 다시 몰려나와 공을 찼다. 끔 그는  불쑥 소리도 없이 나타나 공을 들고 사라지기도 했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행동으로 며칠 후에 공을 돌려줬다. 공을 빼앗기면 일부 아이들은 무료함을 달래려고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올라가 놀다.  당시에는 문화재 보호라는 개념이 희박할 때여서 5층 석탑에서 불장난하는 친구도 있었다.  처럼 국보 9호인 정림사지 오층 석탑(당시에는 백제탑 심지어는 평제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평제탑은 백제를 무너뜨린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자기가 백제를 평정했다는 기록을 탑에 남겨둔 것에서 비롯됐다.)을 놀이터 삼아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도 '찬란한 백제문화'를 느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찬란하다'는 말에 회의감이 점점 커져갈 때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의 전기를 읽게 됐다.

"내가 인생 후반기에 트로이나 미케네를 발굴할 수 있었던 것은 8년 동안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인리히 슐리만의 자서전 중 -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때  [이야기 국사]를 읽었다. 단군조선 및 부여에서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는 우리나라 역사를 어린이들이 읽기 쉽도록 25권으로 구성한 책이었다. 우리 역사가 너무 재미있어 읽고 또 읽다 보니 거의 외울 정도가 됐었다. 슐리만도 그가 트로이를 발굴할 꿈을 키운 결정적 계기로  여덟 살 무렵 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다 준 루드비히 예거의 [어린이를 위한 세계사]라는 책을 본 것이었다고 했다.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가 비슷하다는 사실과 고고학적 발굴로 잊힌 역사를  증명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어서 오랫동안 하인리히 슐리만은 나의 우상이 되었다.  


그의 전기를 읽고 난 후 어쩌면 백제시대 유적들도 부여 시가지 밑에 묻혀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하며  때때로  부여 시가지를 파헤치는 꿈을 꾸기도 했다.


하이리히 슐리만과 트로이 유적

초등학교 때 처음 품은 '찬란한 백제문화'에 대한 궁금증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동안 잊히기는녕 점점 더 게 마음속에 각인되었다. 특히 1970년대에 《백제사》를 펴낸 문정창이라는 분이 ‘백제는 로마제국 같은 대제국’이라는 취지로 어느 신문과 인터뷰한 기사를 읽고 나서 더욱 증폭되었다. 그때 이후 ‘동양의 로마제국’이라는 단어는 내 머릿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고 틈나는 대로 백제와 관련된 글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백제를 알고, 그 역사를 밝혀보자는 욕망 강해졌지만 현실은 달랐다. 자식이 보다 안정적인 삶을 살게 하려는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대학에서는 역사 대신 무역학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역사와는 무관한 분야에 종사했다. 젊은 날의 에너지를 회사에서 모두 소진하고  50살이 되었을 즈음 때 문득 슐리만이 생각났다. 젊었을 때 품었던 '백제의 '을 이루지 못했지만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슐리만처럼 부여에서 고고학적 발굴을 시도하지는 못했지만, 역사연구조차 못해 봤지만 미련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트로이 화재 이후 도망치는 아이네아스], 루벤스, 17세기경.

의지만 있다면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하지만 50살을 넘으면서 새삼스럽게 역사공부를 시작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더욱이 슐리만처럼 고고학적 발굴을 한다는 것 꿈도 꿀 수 없었다.  새롭게 공부할 자신이 없다는 무기력함과 백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밝혀낼 수  없다는 안타까움으로 늘 가슴은 꽉 막힌 것 같았다. 바로 이럴 때 '우여'를 읽 오경자 교수님이 "백제 얘기를 써보시죠?"라 던진 제안 꽉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청량제였다.


슐리만이 발굴로 토로이를 찾아낸 것처럼 백제시대 걸작으로 우연히 발굴된 '금동대향로'를 소재로 장편소설쓰기했다. 금동대향로는 1993년 12월 12일 부여읍 능산리 왕릉원 절터의  목곽 수로 안에서 발견되어 국보 제287호로 지정된 백제시대 유물이다.


발굴당시의 모습과 현재 모습의 금동대향로

소재가 결정되자 소설을 구상하면서 역사를 연구하는 마음으로 관련 자료를 읽고 분석(?)했다. 마치 작가이기를 포기한 것처럼.... 그날부터 처녀작을 쓰기 위한 지난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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