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서 부여까지
"당나라 소정방이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러 가다가 오성산에서 짙은 안개에 갇혀 길을 잃었다. 바로 그때 5명의 노인이 나타나자 소정방이 사비로 가는 길을 물었다. 노인들이 대답하기를 “너희가 우리 백제를 공격하러 왔는데 어찌 적에게 길을 가리켜 준단 말이냐!” 하며 거절했다. 이에 분노한 소정방이 다섯 노인을 죽였다고 한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로 돌아가던 소정방이 다시 이곳에 들러 노인들의 충절을 기려 시신을 수습하고 후하게 장사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그때 이후 이 산의 이름이 오성산이 되었다고 한다. "
좌평 의직(義直)은 "당나라가 우리에게 패배하는 모습을 보면 신라는 감히 나서지 못할 것"이라며 당나라를 먼저 치자"고 제안했다. 반면 달솔 상영(常永)은 "당나라와는 대치국면을 유지하고, 약한 신라군을 먼저 격파한 뒤에 당나라를 치자"라고 제안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6월)
"당군은 조수를 타고 배가 꼬리를 물고 나아가며 북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바로 도성으로 나아가 30리쯤 되는 곳에서 멈추었다. 우리 군은 모든 병력으로 막았으나 또 패하여 죽은 자가 만여 명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반조원(頒詔院)이라는 이름은 백제 사비성을 공략하기 위해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곳에 진을 치고 '반조', 곧 당나라 황제의 조서를 반포했다고 하여 생겼다고 합니다. 수로를 따라 사비를 향해 북진하던 도중 임천의 가림성을 통과할 수 없어 이곳 반조원에서 신라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데 당나라 황제가 조서를 보내온 것입니다. 이를 읽은 소정방은 작전을 바꾸어 북진을 계속하고 육로로 오는 신라군과 합세하여 사비성으로 들어갔다고 해요.
(출처 : 부여군청)
정방이 꺼리는 것이 있어 앞으로 전진하지 않자, 유신이 달래어 신라군과 당군이 용감하게 네 길로 나란히 나아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7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