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책이 나오자 애정을 보여주는 독자도 생겼다. 그 가운데 TV 연기자가 있다. 첫 번째 소설인 '지워지지 않는 나라'의 여주인공 '박은서'와 이름이 비슷해서 더욱 호감을 준 여자였다. 그녀는 우리 문화사에 관심이 많아 대학원에서 그 분야 학위도 받았다. '백제 수륙대제'에 대해 그녀가 쓴 논문을 읽어보라며 내게 건네주는 손에는 뿌듯한 자부심이 담겨있었다. 연기자 생활을 하면서 학업도 병행하고 관련 전문가들과도 폭넓은 교류를 하는 그녀를 만나는 것은 즐거움이었다. 한편으로는 부러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에게 자극을 받아서 그랬는지, 버킷리스트의 하나가 곧 마무리된다는생각때문에서였는지 모르지만 이 무렵부터 다시 회사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내겐 바람직하지 못한 습성이 하나 있다. 익숙함에 대해 지루함을 느끼는 것이다. 좋게 표현하면 도전적인 성격이겠지만 변덕스럽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전문가가 되기 어려운 성격인 셈이다. 이런 변덕스러움 때문에 여러 차례 전직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쁘지 않은 성과를 냈고, 평도 괜찮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삶을 다시 산다면 한 우물을 파는 인생을 택할 것 같다.
세 번째 소설을 준비하면서 지인들에게 재취업 의사가 있음을 알렸다. 높은 소득은 기대하지 않고 그저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를 되돌려줄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곁들였다. 어쩌면 회사원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그보다는 회사를 떠날 때 상황이못내 불만스러워서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여하튼 겉으로는 회사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면서 적극적인 구직활동은 하지 않아 흐지부지해졌다.
세 번째 소설에 착수했다.어쩌면 마지막 소설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주제 선택이 신중해졌다. 그런 와중에 연기자 팬(?)이 정치 위주의 역사소설도 좋지만 문화를 소재로 글을 써보라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소재가 미마지와 아비지였다.
미마지 탈춤
미마지는 백제여인으로 중국의 오나라에서 무용을 배워 백제로 귀환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춤의 시조가 되었다. 아비지는 백제의 목공으로 신라 선덕여왕 때 황룡사 9층 탑을 완공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목조탑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활동하던 분야는 달랐지만 두 사람의 행적이나 활동 시기가 비슷해서 두 사람을 연인으로 설정하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목탑에 관한 자료를 읽어보고 미마지 탈춤을 보며 스토리를 구성했지만 마음을 잡아끄는 주제는 따로 있었다. '사비로 가는 길'을 쓰는 동안 머릿속에 내내 남아있던 은산별신제였다. 은산별신제는 사비성 함락 이후 전개된 백제부흥군과 관련된 이야기다. 은산지역에 괴질이 창궐했을 때 복신 장군이 꿈에 나와 원통하게 죽은 백제부흥군의 시신을 수습해주면 괴질을 퇴치시켜주겠다고 했다는 전설이 배경이 된 별신제다. 결국 별신제, 괴질 그리고 백제부흥군을 소재로 소설을 구상했다. 제목은 '루프(Loop)'로 정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 반복되는 삶을 주제로 쓰려한 것이다.
은산별신제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다 일본 규슈 동남쪽 미야자끼 현의 미카도라는 작은 도시에서 열리는 시와스마쓰리를 알게 됐다. 의자왕의 후손인 정가왕((禎嘉王, 데이카오)을 기리는 축제다. 은산별신제와는 공간적 배경이나 시대적 배경에 차이가 있었지만 백제라는 공통점 때문인지 묘한 끌림이 느껴졌다.처음에 구상했던 소재에 시와스마쓰리를 추가했다.
시와스마쓰리의 한 장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소설의 제목과 함께 '지워지지 않는 역사'라는 부제도 붙였다. '지워지지 않는 나라'에서 출발하여 '지워지지 않는 의자왕'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역사'로 시리즈화한 것이다. 마침내 본격적으로 세 번째 장편소설을 향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