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소설 'LOOP'는 오지를 찾아다니며 소수민족의 생활을 촬영하는 여류 사진작가, 그녀의 친구면서 데이카오가 환생한 역사학자, 데이카오와 불구대천의 원수로 그의 존재를 없애려고 구천을 떠도는 악령 압시리 그리고 데이카오를 지키기 위해 그의 애완견에게 깃든 영혼을 중심으로 시공간을 넘나드는 이야기로 구성했다. 의도는 창대했지만 내용은 참담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 탐닉했던 무협소설이 고개를 디밀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스타워즈가 끼어들기도 했다. 귀신들끼리 치열하게 다투는 대목에서는 해리포터를 떠올리게 했다. 판타지 소설도 아닌 참으로 희한한 글이 써진 것이다.
런던 킹스 크로스역의 플랫폼 9와3/4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바꿔보기도 하고 줄거리를 변경하기도 했지만 중국 무협소설과 스타워즈 그리고 해리포터가 뒤섞인 내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제목을 'LOOP'에서 '무한반복'이라고 바꿔보기도 했지만 수렁에 빠진 것처럼 점점 애매한 상황으로 흘러만 갔다. 짜증도 나고 스트레스 지수도 점점 높아져 일단 글쓰기를 멈췄다.
오랜만에 연기자 팬을 만났다. 시간이 꽤 지난 다음이었지만 그녀는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연기자라서 그런지 본래 성품이 그런 것인지.... 대화 도중 그녀는 불쑥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이병호 미륵사지 박물관장의 '내가 사랑한 백제'였다. 재미있게 읽었다며 내밀기에 아무 생각도 없이 받아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철 안에서 책을 펼쳤다. 첫 장부터 흥미진진한 내용이어서 마치 무협지 읽듯이 단숨에 읽었다. 백제에 대해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에 충격마저 느꼈다.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어 책을 샀다. 그녀를 만나 책을 돌려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며 살며시 웃었다. 그녀 특유의 웃음이다. 책을 내밀었을 때 그녀의 의도는 책 제목을 확인하고 사서 보라는 뜻이었다는데 대뜸 들고 가는 바람에 당황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당황한 이유와 다르기는 하지만 나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역사 공부를 했더라도 이병호 관장처럼 깊은 지식을 쌓고, 그 지식을 유려하게 글로 써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책을 다시 읽고 나서 미륵사지와 왕궁리를 돌아보려고 익산을 찾았다.마음 한편으로는 이병호 관장을 만나볼까 말까 하는 망설임도 품고....
미륵사지 조감도와 왕궁리 5층석탑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왕궁리의 백제왕궁터에 대관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백제가 망하기 전에 왕궁이 있던 곳에 절이 세워졌다는 사실이 흥미로워 대관사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다 뜻밖에도 대관사에서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서거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백제부흥군과 신라군 간에 벌어진 전투 기록도 제법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가벼운 흥분마저 들었다.
곧이어 백제와 관련한 연구를 담은 책들을 지인으로부터 받았다. 승천석 교수의 '대백제의 꿈', '백제의 장외사, 곤지의 아스까베 왕국', '백제의 영남 공략 실패와 새로운 선택'이 바로 그 책들이었다. 원로학자가 심혈을 기울여 쓴 책이지만 우리나라 학계에서 공인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일본 역사를 잘 알지 못해 승천석 교수님의 주장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고 일본어 지명이나 인명, 특히 고대 인명이나 지명이 많이 나와 읽기도 어려웠다. 글의 흐름을 놓쳐 앞 페이지로 돌아가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읽다 보니 세 권을 모두 읽는데 3개월이 넘게 걸렸다. 어렵게 읽었지만 고대 일본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한반도에서 건너간 우리 조상들이 끼친 영향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책들이었다.
그는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정년퇴직을 하고 본격적인 역사연구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의 저서들은 대부분 70대의 나이에 발표되었다. 더욱이 그는 대학에서 역사가 아닌 경제학을 전공했다. 나하고 겹치는 것이 많은 노학자가 묵직한 주제의 연구보고서를 펴냈다는 사실에 존경의 마음이 절로 우러나왔다.그야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물이 아닌가? 어릴 적 품었던 꿈이 되살아나며 그가 간 길을 따라가고 싶었다.
100세 시대라는데, 앞으로 살아갈 날이 수십 년은 남았는데 하고 싶은 공부를 못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결코 늦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도 이병호 관장의 책을 보고, 승천석 교수의 연구보고서를 읽고 나서 내 앎의 세계가 너무도 좁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쓰기를 미뤄두고 독서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고갈되어 버린 지식의 곳간부터 채워야 했다. 그날부터 이틀에 한 권 꼴로 책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