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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Oct 11. 2021

오징어 게임도 ‘평등’을 말했건만

기후 정의(climate justice)를 생각하다

오징어 게임 스포일러 주의!

며칠 전, 홍콩에서 친하게 지내다가 본국으로 돌아간 이탈리아 친구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너 넷플릭스에서 한국 드라마 봤어? 제목이 뭐더라, 오징어 어쩌고던데. 그거 요즘 이탈리아에서 난리야!” 물론 봤습니다. (임신 중에 선혈이 낭자한 걸 봤다고 자랑하긴 민망합니다만, 두 번 봤습니다.)


재미난 포인트가 한두 개가 아니지만,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시체의 장기를 몰래 빼돌리던 의사와 진행 요원 일당이 프런트맨에게 발각되어 가차 없이 총살을 당한 것이었어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들의 시체는 핑크색 계단 가운데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매달려 일종의 ‘본보기’가 됩니다. 그 이유는 게임의 가장 근본적인 규칙, ‘평등’을 어겼기 때문이지요. 탈락이 곧 사망이고, 서로 죽고 죽여야 하는 살벌한 규칙 앞에 과연 평등이라는 고차원적 개념을 논할 수 있느냐는 차치 하더라도, 일단 표면적으로는 모든 참가자는 1) 자기 의사로 참여하고, 2) 사전에 게임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모두 동일한 선상에 놓여 있으니까요. 미리 게임의 종류를 알려주었다는 행위는 게임의 근본 자체를 뒤흔든다고 본 것이지요.


놀이 한 번에 생사가 결정되는 이런 게임에서 과연 ‘자유 의지’나 ‘평등’이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지만, 전 세계적으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 불합리하고 잔인한 게임이 인간 사회를 어느 정도 닮아 있기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 우리는 자라면서 표면적으로나마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배웁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실제로는 모두에게 공평한 삶과 기회가 주어지는 건 아니지요.



기후변화의 폐해, 결코 평등하지 않다 - 정의는 어디에?

이처럼 우리의 삶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잘못으로 피해를 보기도 하고, 갑자기 자연재해라도 발생하면 누구의 탓을 할 것도 없이 고통을 당하기도 하죠. 기후변화와 그 폐해도 후자의 경우에 해당할지도 모릅니다. 지구가 더워지며 극단적인 기상 현상이 잦아지고, 자연환경이 파괴되며 아무 잘못 없는 사람들이 많은 피해를 보고 있으니까요. 지나간 여름만 해도 폭염과 열돔 현상, 거센 태풍과 홍수로 인해 지구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재해조차 사실 ‘평등’하게 다가오는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더워지더라도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업과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받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요즘 화두 중 하나로 등장한 개념이 ‘기후 정의(climate justice)’입니다. 여기서 정의라 함은 “정치적, 법적인 정의를 달성해야 한다!”보다는, “피해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에 가까운 개념 같아요. 기후변화의 폐해가 부의 소유 정도에 따라, 인종에 따라, 남녀에 따라, 장애 여부에 따라, 사는 지역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에 주목한 건데요. 저도 이전에 이와 관련하여 글을 쓴 적이 있어요.  


이것만큼은 남녀가 똑같을 줄 알았는데 ​- 기후변화로 힘든 게 성별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렇지만 남녀가 겪는 폐해는 다르다

이렇게나 불공평할 수가​ - 국가 간 에너지 자원의 분포도, 에너지 사용과 그로 인한 기후변화에 대한 책임도 결코 공평하지 않다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화석 연료 사용을 줄인다고는 하지만, 어떤 계층에게는 그조차 사치입니다. 실제로 영국은 선진국이지만 요즘 에너지 대란이 일면서 저소득층은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부쩍 추워진 날씨에 에너지 가격도 부담이 될뿐더러, 살고 있는 집도 애초에 단열이 부족해 난방 수요는 더 크죠. 부자들은 에너지 효율이 높은 집에서 난방비 걱정 없이 살아가는데 말이에요. 가난한 나라들은 더합니다. 최근 모잠비크에서는 사이클론 피해가 엄청났는데요, 이런 상황에서는 탄소 발자국이고 뭐고, 생존이 우선 아니겠어요? 그러고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잘못한 사람 따로, 피해 보는 사람 따로?


사실 폐해뿐 아니고, 기후변화의 원인을 잘 따져보면 단지 인간의 손을 떠난 자연재해로 볼 수 없음을 알 수 있어요. 지구 온난화와 환경 파괴는 인간의 화석 연료 사용 때문에 비롯된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것도 지구 상 모든 인류 한 명 한 명이 동일한 책임을 지는 건 아닙니다. 이제까지 경제 발전을 주도한 선진국들과 아직 개발이 덜 이루어진 개도국의 책임 차이는 분명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2021년 현재의 탄소 배출량이 아닌, 역사를 통틀어 ‘누적’ 총 탄소 배출량을 계산하여 각국의 책임 소재를 수량화하고자 하는 노력도 진행 중입니다. 한국의 경우 현재의 스냅샷만 보면 상당한 빌런입니다만 (그만큼 경제 규모가 크단 얘기죠),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는 기타 선진국에 비해서는 어린이 수준이죠.

1850-2021년 간의 국가별 누적 탄소배출량 (화석 연료, 시멘트, 토지사용 전환 및 벌목으로 인한 배출량 10억 톤 기준, 출처: Carbon Brief)


최근 기후변화 연구에 관련해서도 편향이 존재한다는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는 과학적 현상을 수반하다 보니 정책도 학계의 연구에 많이 기대는 편인데요, 그 연구를 하는 사람들 자체가 대개 북반구 부유한 국가들의 남성들이 절대다수라는 겁니다. 사회 자체의 학문적 인프라나 연구에 접근할 기회가 다르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런 현상이 발생했겠지만, 이로 인해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연구의 주제나 결론이 편향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의식이 대두된 거죠.


한 사회 내에서의 정의는 법과 절차로 달성될 수 있지만, 국제 사회에서의 정의는 쉽게 달성되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불공평하고 부조리해도, 권위 있는 세계 정부가 있는 것이 아닌 이상 그저 정치적, 경제적 권력 구조에 따라 흘러가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기후 정의에 대해 논의하는 건 어찌 보면 뜬구름 잡는 소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문제를 직시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노력이 그만큼 더 소중할지도 몰라요. 선진국이 금전적으로, 기술적으로 좀 더 책임을 지고, 지금 누리는 부를 개도국 사람들도 청정한 방식으로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줘야 정의가 달성될 테니까요.



가장 약한 사람에게도 미치는 배려, 정의

정의라 하면 마치 엄청나게 거창한 개념 같지만, 사실 정의는 우리 사회의 신뢰를 구축하는 기본이 됩니다. 아무리 다수가 찬성하더라도 부당하게 피해를 받는 약자가 있다면 용납하지 않는 사회, 규칙을 어길 경우 법의 이름으로 심판을 받는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테니까요.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변화도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손을 잡고 협력하여 더 이상의 폐해를 막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정의를 달성해야 한다는 담론이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겁니다. 즉,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것에 대해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고, 대처할 능력이 부족한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화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최근 이진민 님의 신간을 읽었는데요(강추!!), ‘정의 대한 부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버니 샌더스는 “정의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고 싶은 만큼 타인을 대하는 이라고 했다고 해요. 많은 철학자들의 어렵고 심오한 말보다  와닿는 표현인데요,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기후변화인 만큼 가장 어렵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까지 이런 배려와 친절이 미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합리적 인간이라면 나의 위험을 최소한도로 줄이고자 자연스럽게 가장 약자의 입장에서 사고하게 된다. 최약자에게 안전한 세상이라면 결국 모두가 안전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 이진민,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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