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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Mar 09. 2022

홍콩에서 헬퍼와 살기 vs. 한국에서 헬퍼 없이 살기

이른 아침, 아이를 재촉해 아침을 먹이고 옷을 갈아입혀 스쿨버스를 태우러 보낸다. 식탁에는 계란 노른자 흘린 것이며 빵가루가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고, 마시다 남은 우유와 잼이 미처 냉장고에 들어가지 못한 채 그대로다. 아이가 벗어놓은 잠옷은 허물 벗듯 거꾸로 뒤집혀 복도 한 귀퉁이에 구겨져 있고, 부엌은 김밥 도시락을 싼 흔적으로 폭탄을 맞은 듯하다. 그런 집을 뒤로하고 나는 아이 버스 시간을 맞추러 서두른다.


아이는 아파트 정문 앞에서 버스를 탄다. 마침 난 이웃에 사는 다른 엄마를 만나 잠깐 수다를 떨고 귀가한다. 다시 들어온 집은 한 눈에도 깨끗하다. 식탁과 부엌은 먼지 한 점 없이 싹 치워져 있고, 우리가 벗어놓은 번데기 같은 옷가지들도 착착 정리되어 옷장이나 빨래 바구니에 들어가 있다.


집에 우렁 각시가 사냐고?

아니, 우리 집엔 헬퍼 아주머니가 계셨다.


월요일부터 토요일, 새벽부터 밤까지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분들을 홍콩에서는 헬퍼라 부른다. 필리핀 등지에서 인력을 수입하는 제도로, 물가에 비해 아주 저렴한 편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만 여유가 있으면 집집마다 헬퍼가 있다.


홍콩의 헬퍼에 대해선 이 글:

https://brunch.co.kr/@yjeonghun/13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집안일을 도와주시는(이라기보다 도맡아 하는) 분이었다. 아이 친구가 놀러 와서 온갖 장난감을 다 늘어놓고 놀아도 잠깐 놀이터에 갔다 오면 집 안은 깨끗하게 리셋되어 있었다. 영어 레시피만 있으면 미역국이며 닭볶음탕까지 무슨 요리든 뚝딱 해 주셨다.


그뿐인가? 현금 카드에 충전만 해 주면 홍콩 내 어디든 우리가 필요한 걸 사러 가 주셨고, 내가 외출했다가 아이 픽업 시간에 늦어지면 아이를 대신 맞아 주었다. 작년 10월, 둘째가 태어나자 그분의 능력은 더 마법사 같아졌다. 산후조리를 하는 나의 삼시 세끼 식사를 오롯이 책임져 주셨고, 첫째의 학원 스케줄을 챙기고 짬짬이 아기를 봐주는 등 나를 극진히 도와주셨다.


외국에서 출산하는 바람에 산후조리원 천국을 끝끝내 맛보지 못한 나였지만, 헬퍼 덕에 생각보다 서럽지 않았다. 그녀가 해 주는 필리핀식 파파야 수프 덕인지 모유는 금방 돌았고, 잠투정이 심한 아기도 우리 "앤티" 품 안에 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진정되곤 했으니까.



한국행이 결정되고 나서, 나는 잘 지내던 그 분과의 작별이 가장 아쉬웠다. 정이 많은 첫째도 우리 앤티를 정말 좋아했다. 원래 이름은 따로 있지만 “앤티 벨”이라고 자기가 별명을 붙여서 다정하게 부르곤 했다. 우리 부부도, 우리 사정 때문에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다른 집에 가야 하는 헬퍼 아주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여러 경로로 다른 가족을 물색해서 (나름 우리 아주머니와 잘 맞을 집을 엄선하여) 인터뷰를 보게 주선해 주고, 퇴직금과 선물도 열심히 챙겼다.


그리고 물론, 정이 든 아쉬움만은 아니었다. 이제 한국에 가면 헬퍼 없이 살아야 하는데, 젖먹이 아기와 초등학생을 데리고 밥은 어떻게 해 먹나 겁부터 났다. 아기가 자라면 이유식도 해 먹여야 하고 기어 다니면 한시도 눈을 못 뗄 것이 뻔한데, 그 와중에 큰애 등하교와 숙제는 어떻게 봐주나. 우리 식구만 단출하게 살던 외국 생활과 달리 새 직장에 가면 남편은 훨씬 바빠질 것인데.


홍콩에 사는 교민들 사이에서 자주 들은 말이 있다.


“남편 없이는 살아도 헬퍼 없이는 못 산다.”


나는 처음에 이 말이 그렇게도 싫었다. 물론 그만큼 편하단 거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 몸 하나 편하자고 인생의 짝꿍을 그렇게 저버릴 수 있나 싶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것이, 막상 헬퍼가 없는 곳으로 떠나려니 갑자기 그 말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농담인 선에서. (가만 보자, 그런데 남편도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마침내 귀국. 헬퍼의 빈자리는 한국에 도착한 즉시, 아니 이미 홍콩을 떠나기도 전부터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아기를 데리고 예방 접종을 하러 갈 때도 옆에서 기저귀 가방을 들어주고, 내가 서류를 작성할 때 아기를 받아 안아 주던 그녀다. 이 모든 것을 오랜만에 나 혼자 하려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격리 기간에는 더했다. 딱히 거창하게 하는 일도 없이 그저 존재만 하는데, 그에 따른 소소한 집안일들이 이렇게까지 많았었나. 삼시세끼 밥을 먹고 치우고, 청소와 빨래를 하고, 심심해하는 큰애를 놀아주고, 50일 된 아기를 어르고… 아아, 우리의 헬퍼.


물론 한국에서 살림하는 건 홍콩과는 비교도 안되게 편하다. 배민, 마켓 컬리, 쿠팡 삼총사에 반찬가게까지 얹으면 세상 두려울 것이 없다. 하지만 이 또한 내가 귀국한 지 두 달이 되어 마스터한 것이지, 한국식의 편리함은 그 편리성마저 학습이 필요했다.


청소가 급해 일주일에 한두 번 청소 도우미를 고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청소 도우미는 헬퍼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하루에 세 시간 정도 청소를 싹 해 주시는 것은 물론 어마어마하게 큰 도움이 되었지만, 살림하는 사람은 알 거다. 집안일은 자고로 "하루 종일 자질구레하게" 나온다는 것을. 아주머니께서 아무리 깨끗하게 대청소를 하고 가 주셔도, 학교에 다녀온 첫째가 흘린 과자 부스러기며 아기가 토한 옷, 저녁을 준비하고 난 싱크대 등은 결국 오롯이 내 몫이었다.



이제 헬퍼 없이 산 지도 두 달 반이 되어가고, 집 안은 예전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적당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철없이 그녀에게 의존했던 내 마음에도 몇 가지 깨달음이 찾아들었다.


첫째, 헬퍼 아주머니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일을 했었던 거다.


사람 마음이 정말 우스운 것이, 사람을 고용하고 나면 본전을 생각한다. 한국의 이모님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가격에 수많은 서비스를 받아 놓고는, 슬그머니 '그래도 우리가 돈 주고 고용하는 건데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그래도 헬퍼 아주머니에게 많은 일을 맡긴 편은 아니었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에는 첫째 케어는 나와 남편이 나누어서 백 퍼센트 했고, 헬퍼가 시간이 남으면 충분히 휴식을 취하도록 했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너희 헬퍼는 정말 일 없어서 좋겠다'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러나 일이 비교적 많지 않았기에 기준이 점점 높아졌다. 항상 깨끗한 집이지만 구석에 먼지라도 보이거나 내 방식대로 그릇이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했다. 한 번은 큰애의 유니폼을 빨아놓지 않았다고 무척 화가 난 적도 있다. 처음에는 고맙기만 하던 그녀의 수고가 점점 당연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몇 년 만에 다시 집안일이 내 손에 떨어지고 나서야 헬퍼가 하던 소소한 일들이 얼마나 많았으며 나를 얼마나 크게 도와주었는지 깨달았다.


둘째,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몫을 미루고 지냈다.


사실, 헬퍼를 고용하고 나서 우리 부부는 사이가 무척 좋아졌었다. 부부 사이에 사소한 다툼의 원인을 생각해 보자. "여보, 양말 좀 뒤집어서 벗지 말랬지?" "밥 먹고 바로 설거지해 달라고 했잖아." "내가 여기 둔 열쇠 어디에 치웠어?" 등등. 우리 부부는 지난 2년 반 동안 이런 일로는 다툴 일이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부탁하는 대신 헬퍼에게 부탁했고, 남편도 그랬다.


우리는 가사를 분담하는 협상과 대화도, 그로 인한 다툼도 모두 헬퍼라는 우산으로 피하고 살아왔다. 헬퍼 고용 전에 분명 해 왔던 것인데도, 2년 반 동안 무뎌진 우리의 감각은 귀국하고 나서야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짐 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다소 날 선 말도 오가고, 서로가 다르게 가지고 있는 깔끔함의 기준도 각자 어느 정도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자 우리 집은 정말 우리 집 같아졌다. 항상 남의 손이 닿은 집이 아니라, 우리 손길만 닿은 우리의 살림살이.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이를 헬퍼의 도움에만 익숙한 "콩 키드(Kong Kid, 헬퍼가 키워서 독립성이 부족한 홍콩의 어린이를 지칭하는 말)"로 키우고 싶지 않아 웬만한 일을 아이가 하도록 시켰었다. 등교 전 책가방을 챙기고, 저녁 식사 후 그릇을 정리하는 일 등.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원칙일 뿐, 도와줄 사람이 있을 때 우리의 마음가짐은 해이해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매일 아침 일어나서 침대를 정리하기로 약속했었는데, 유달리 바쁜 아침 하루쯤 빼먹어도 오후에 들어오면 침대는 호텔처럼 깔끔했다. 아이가 자기가 남긴 너저분한 자리를 직접 봐야 '아, 오늘은 빼먹었구나. 내일은 꼭 정리해야지'라고 마음을 먹을 텐데,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귀국을 하자 아이가 가장 신기하게 생각한 것은 밖에 혼자서 돌아다니는 초등학생들이었다. 홍콩은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도 학원을 가거나 놀러 나갈 때 늘 헬퍼가 데리고 다니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혼자 나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제야 아이는 마땅히 자기가 겪었어야 할 독립성의 모험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셋째, 우리의 앤티는 정말 좋은 분이었다.     


이제 나는 이곳의 삶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한국식의 편리함을 마음껏 만끽하고 있다. (오전에 책을 주문하니 저녁 전에 도착했다.. 대박) 헬퍼 고용 전에는 미처 몰랐지만 내가 직접 손에 물을 묻히는 노동도 가치 있게 느껴지고, 거기서 오는 즐거움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헬퍼 아주머니는 그립다. 그녀가 해주던 일도 조금 그립지만, 그보다 밝고 착했던 성품을 지닌 그 사람이 그립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코로나도, 둘째도 모두 열 배는 힘들었을 것이다.


얼마 전, 홍콩에 남아 다른 고용주 집에서 일하는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반가운 마음에 아이들의 사진을 몇 장 보내 주니, 자신의 셀카를 찍어서 보내 주었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눈물이 난다고 했다. 큰애에게 앤티의 사진과 말을 전해 주니 아이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만큼 서로의 삶에 따스함을 남긴 관계라니, 그것만으로도 그분은 자기 할 몫을 다 해 주신 것 같다.   



그러니 아직 홍콩에 있는 주부들이여, 귀국을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다 해낼 수 있다. 그래도, 있을 때 충분히 누리시기를, 그리고 그분들의 노동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하시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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