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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Oct 26. 2022

고흐의 ‘해바라기’에 토마토 수프를 뿌려 버리면

요즘 동네 놀이터를 나가면 평일 오전에도 초등학생들이 놀고 있다.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이 일주일 넘게 ‘등교 거부’를 하고 있는 탓이다. 학교와 학부모, 교육 당국 간의 첨예한 갈등이 있어 계속 시끄럽다가, 결국 마지막 수단으로 등교 거부를 선택한 모양이다.


아주 자세한 내막까지는 몰라도, 제삼자가 듣기에도 뾰족한 해결책이 없어 참 답답한 사안이다. 그러나 다 떠나서 학부모의 결정으로 아이들이 학교를 가지 않고 있다는 것에 우려를 표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오죽하면 이렇게까지 하겠느냐”라는 말에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아이들의 교육권이라는 것도 있으니 말이다. 목적 달성을 위해 논란 많은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비슷하게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한 극단적 수단’이 드러난 사건이 최근 있었다. 영국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명화 ‘해바라기’에 관람객 인척 하던 두 사람이 토마토 수프를 뿌리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들은 "Just Stop Oil"이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기후 위기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화석연료를 태우고 있는 사태에 화가 나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다행히 그림에는 보호 유리가 덮여 있어 그림 자체가 훼손되지는 않았다는데, 나는 기사에서 그 부분을 읽기 전까지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이게 다가 아니다. 며칠 전에는 독일에서 다른 기후 활동가들이 클로드 모네의 '건초더미'에 으깬 감자를 뿌렸다. 기후변화를 막을 행동을 당장 해야 한다며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으깬 감자를 뒤집어쓴 모네의 '건초 더미' (이미지: AP)


기후 활동가들은 그에 앞서 7월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복제본과 존 컨스터블의 '건초 마차' 액자에 순간접착제로 손바닥을 붙이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행위 예술에 가까운 이러한 행동들이, 관심을 끄는 것이 목적이라면 너끈히 그 목적을 달성할 만큼 많은 이목을 집중시켰다. 


과연 이런 극단적 행동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진보 언론에서는 “(기후 위기 때문에) 진짜 해바라기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그림 해바라기가 더 중요할까?”라는 요지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는 이러한 시도가 기후 위기 해결에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그저 ‘관종’ 짓에 불과하다는 목소리도 크다. 심지어 환경주의자들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충격 요법으로 경각심을 준다는 취지인데, 명화가 토마토 수프를 뒤집어쓰는 것이 대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기후변화 담론이 예전부터 많이 이루어진 영국에서는 이러한 극단적인 시위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2019년에는 런던을 가로질러 흐르는 템스강의 주요 다리 5개를 모두 가로막는 바람에 사람들이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일도 있었다. 또, 영국 재무부 건물 앞에서 소방차 펌프로 비트 주스로 만든 가짜 피를 뿌려대는 퍼포먼스도 했다. 

영국 재무부 앞의 시위 (이미지: 로이터통신)

그러나 기후 활동가들이 지하철을 막고 차량을 운행하지 못하게 했을 때는 시민들도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난 그냥 출근하고 있을 뿐이에요." 한 승객이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러 가고 있을 뿐이라고요." (마이클 셸런버거, <지구를 위한 착각> p. 25)


지구를 위한다면서, 우리 모두의 더 큰 이익을 위해 잠깐의 희생을 하는 것뿐이라며 넘기기엔 이들의 행위는 남에게 참 많은 피해를 끼친다. (명화에 음식을 뿌려 대는 자리에 쫄보인 내가 다른 관객으로 있었다면 너무 놀라 심장마비라도 걸렸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대의가 정당하다고 해서 수단이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참 오래된 듯하다. 인종 차별이라는 명백한 불의한 상황에서도 비폭력주의를 고수한 마틴 루터 킹이 있는가 하면, 폭력이라는 수단을 정당화시킨 말콤 X 같은 인물도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도 상황은 매우 부조리하다. 누릴 건 다 누린 현재 세대와, 그 때문에 더워진 지구를 물려받게 생긴 미래 세대 간의 불평등은 인종 차별 뺨친다. 그뿐인가? 화석 연료에 기대 경제 성장을 달성한 선진국과, 기후변화에 그다지 기여하지 않았는데도 홍수와 가뭄에 시달리는 빈곤국 간의 불평등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죄 없는 고흐와 모네를 끌어들여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목을 집중시키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당장 끝내주는 효과가 있다고도 볼 수 없으니까. 



그러나 이런 극단적 수단도 종종 고려할 만큼 기후변화가 주요 담론인 영국 사회의 모습은 부러운 점도 있다. 얼마 전 책을 읽는데, 청소년 아들을 키우는 엄마가 쓴 책이었다. 

학생들은 투표에 앞서 시티즌십 에듀케이션 시간에 각 정당의 공약집을 교사와 함께 읽어본다고 했다. NHS(국민보건서비스), EU 탈퇴, 교육, 기후 위기 등 네 가지 분야로 좁혀서 정책을 읽고 다 함께 토론해보는 모양이었다.

- 브래디 미카코,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2> 중 

나는 이 부분을 읽고 주요 현안에 기후 위기가 껴 있는 것에 조금 놀랐다. 사실 정말 극단적인 행동이 필요한 건 그다지 기후 위기에 대해 말을 꺼내지도 않는 우리 사회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도 지구의 평균 기온은 오르고 있는데, 과학자들의 권고대로 상승 폭을 1.5도 이내로 맞추려면 2030년까지 2019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을 43% 낮춰야 한다. 그러나 지금대로라면 7% 남짓 감축에 불과할 것이라고 한다. 


굼벵이처럼 느린 변화 속에, 남몰래 토마토 수프를 들고 미술관을 찾는 마음이 이해가 조금 가기는 한다.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건 다른 문제지만. 




참고 기사: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1063957.html


https://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22/oct/19/van-gogh-sunflowers-just-stop-oil-tactics?utm_campaign=Carbon%20Brief%20Daily%20Briefing&utm_content=20221019&utm_medium=email&utm_source=Revue%20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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