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영어공부! (느닷없이)
litigious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소송'이라는 뜻인 'litigation'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영한사전에는 "툭하면 소송하는"이라고 되어 있고, 영영사전에는 1) "or or relating to litigation (소송과 관련된)", 2) "inclined or showing an inclination to dispute or disagree, even to engage in law suits (다투거나 동의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고소까지 갈 정도로)"라고 나와 있습니다. 따로 한 단어의 형용사가 존재하는 게 재밌습니다.
특히 미드에서도 보면 미국 사람들은 툭하면 고소하겠다는 말을 많이 하죠. "I'll sue you! (당신, 고소할 거야!)" 그래서인지 미국에서 판매되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보면 아주 아주 작은 글씨로 구구절절 설명해 놓은 설명을 볼 수 있는데, 소송을 피하려고 그런 점도 있지요. "나 당신네 제품 쓰고 배탈이 났어! 고소할 거야!!" 하면, 기업은 "자세히 보시면 '이 제품은 복통을 유발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책임은 소비자에게 있음'이라고 쓰여 있는데요"라고 반박할 수 있게 말이죠.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요즘은 소비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닙니다.
델타항공, 소송당하다
미국 항공사 중 델타 에어라인이라는 항공사가 있습니다. (미국 국내선을 이용할 때 저희 가족도 자주 탔었는데, 짐을 하도 자주 잃어버려서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진 않아요….)
아무튼 근데 이 델타항공이 최근 고소를 당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일반 시민들이 모여 집단 소송을 제기했어요. 왜냐고요? 다른 여러 대기업들과 마찬가지로 델타 역시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찬찬히 뜯어보니 말도 안 되었다 이겁니다. 이 플랜이 지금 말이 된다고 세워 논 거냐! 차라리 멍멍이가 풀을 뜯지! 하며 패기 있게 고소해 버린 겁니다. (탄소중립이란, 온실가스의 순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순' 배출량이기 때문에, 배출량 자체가 절대적으로 제로가 되지 않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탄소를 줄임으로써 달성할 수 있어요.)
델타항공은 2020년부터 자기네가 세계 최초의 탄소중립 항공사가 될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해 왔습니다. 사실 항공 부문은 탄소중립을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부문 중 하나거든요. 상업용 규모에서 '전기 비행기' 같은 건 없잖아요. 자동차나 1톤 트럭 정도는 몰라도, 중장비나 배, 항공기는 배터리로 가기에는 너무 무거워서 수소 연료 등 다른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탄소 중립을 외치는 것은 굉장히 선구적이라고 볼 수 있죠.
연료를 당장 교체할 수도 없는데 대체 어떻게 넷 제로를 달성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을까요? 델타는 다음과 같은 전략을 내놓았습니다:
- 제트연료 사용량 감축 (연료 사용을 줄이면 당연히 탄소 발자국은 줄어들죠)
- 항공기 효율화
- 열대우림 등 자연 보전을 위한 탄소배출권 구매 계획 등
요런 일에 필요하다며 향후 10년 간 10억 달러를 투입할 것이고, 항공권 요금도 야금야금 올렸습니다. 환경에 신경 쓰는 소비자들은 추가 요금을 기꺼이 지불하면서도 델타를 이용해 왔고요. 그런데 캘리포니아 주의 한 주민이 탄소중립 계획을 뜯어보다 '현타'가 온 겁니다. "이거.... 말이 안 되는데?" 그리고 다른 시민들에게도 집단 소송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해서, 마침내 얼마 전 고소장을 제출했습니다. 실제로 배출량 감축으로 이어지지도 못할 거면서 요금만 올려서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했단 겁니다.
내가 꼭 살을 안 빼도 되는 이상한 다이어트, 탄소 상쇄
그러면 델타의 넷 제로 계획이 정말 말이 안 되는 걸까요?
... 네.
사실 델타만이 아닙니다. 지금 대부분의 정유회사나 대기업들이 주장하는 2050 넷 제로는, 좀 문제가 많습니다. 기업의 배출량을 줄이겠다? 좋다 이겁니다. 문제는 얼마나 실효성이 있냐는 건데요.
다이어트를 한다고 칩시다. 한 달 후까지 10킬로를 빼는 게 목표라고 쳐요. 그러면 차근차근 살을 빼서 목표를 이뤄야겠죠. 그런데 배출량 감축은 다이어트와 달리 약간의 편법(?)을 허용하는데요. 꼭 내가 살을 안 빼도, 남이 빼 주도록 도와줘도 인정해 주는 겁니다. 이런 기똥찬 아이디어를 탄소 상쇄(carbon offset)이라고 합니다. 옆집 언니에게 달리기를 시켜 2kg를 빼 주고, 동생에게 간식을 뺏어가서 1kg를 빼게 하면 나는 10-3=7, 7kg만 빼도 됩니다.
델타가 말하는 '자연 보전을 위한 탄소배출권 구매'도, 말은 되게 그럴 듯 하지만 사실은 이런 겁니다. "나 저기 다른 나라에 나무 심을게. 그 나무가 자라면 탄소 흡수할 테니까, 나 배출량 덜 줄여도 되지?"
실제로 얼마 전 시행된 어떤 연구에 따르면, 기업들이 이런 식으로 탄소 상쇄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모든 나무들을 다 합치면... 지구에 땅이 남아나질 않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많은 나무를 심을 수가 없다고요. 살 빼기 싫어서 주변 사람들 살을 빼 주려고 애쓰는데, 더 이상 빼줄 사람이 주변에 남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러니 탄소중립 선언을 하고 계획을 그럴듯하게 세운다고 해서 진짜 탄소중립이 달성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제는 너도나도 litigious, 흔해진 기후 소송
기후변화 소송을 당한 건 델타항공뿐만이 아닙니다. 저도 몰랐는데 기후변화 소송 관련 데이터베이스가 있을 만큼 기후변화 소송은 흔해졌습니다. 기후변화 관련 소송의 근거는 위 델타항공의 사례처럼 '소비자의 권리'가 침해되었다는 근거도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 '사람답게 살 권리' 또는 '미래 세대의 권리'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2017년 기후학의 세계적 권위자 제임스 핸슨 박사와 청소년들이 함께 기후변화에 대한 조치가 부족하다며 미국 연방 정부를 고소한 경우가 있었고요. 국내에서도 청소년 환경단체 '청소년기후행동'이 현행의 법과 제도가 청소년들의 기본권을 기후변화로부터 보호하기에 부족하다는 이유로 헌법소원을 내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기후변화 소송이 지난 몇 년 간 발생한 걸 보면, 이제 소비자로서, 시민으로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개선되었단 걸 알 수 있습니다. 화석연료를 무기 삼아 몸집을 불린 대기업일수록 사회적, 환경적 책임을 져야 한단 건데, 이런 건 좀 litigious 한 것도 괜찮겠죠?
참고 기사
https://www.impacton.net/news/articleView.html?idxno=6583
https://www.lawtimes.co.kr/news/179913